특별히 못나서 가난해진 것은 아니다

7월의 어느 이른 아침, 제부도의 한 상가 신축 현장이었다. 두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이를 처음 발견한 것은 현장 관계자였다. 두 사람은 연고도, 출신도, 성별도 달랐다. 이들을 묶은 것은 현실과 가난에 대한 비관이었다.

이들은 자살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사흘 전, 소셜 네트워크에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이를 기도하기도 했다. 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이 남긴 유서에는 많은 말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로는 충분했다.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서 태어나길…”

 

가난이라는 비극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돈이 든다. 먹고, 마시고, 자고, 씻고, 쉬는 데에 필요하다. 행여 아프기라도 하면 어떨까. 의료보험제도가 아무리 잘 되어 있다 해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은 상상 이상의 돈을 필요로 한다. 목숨을 유지하는데 그만한 돈이 드는데, 연명을 통해 벌 수 있는 돈이 터무니 없이 적다면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대개, 가난은 곧 죽음이다.

처지를 비관한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흔하다. 송파 세모녀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3년 밖에 흐르지 않았다.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 고통인 노년층의 자살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한 청소년이 남긴 쪽지의 내용이다. “스쿨 폴리스 아저씨는 연락이 없다. 우리가 가난해서 무시하는 것 같다.”

가난은 무시 당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유니셰프가 벌인 흥미로운 실험을 보자. 6살 소녀가 예쁜 드레스와 코트를 입었을 때는 모두가 관심과 호의를 비췄지만, 허름한 차림일 때는 무시와 무관심이 따를 뿐이었다. 소녀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가버리라고 말했는데 그게 너무 슬펐어요.”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대개의 가난한 사람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해서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경제상황에 맞춰,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저 조금씩 가난해져 왔을 뿐이다. 부모의, 그 부모의, 그 부모의 가난을 따라서.

과거에는 가난을 뒤집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교육이 그랬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높은 월급을 받으며 남 눈치 안 볼만큼은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좋은 학벌을 위한 경쟁만 유지될 뿐, 좋은 학벌이 보장하는 미래 따위는 사라졌다.

‘학벌없는사회’가 해산하며 남긴 글을 보자.

“재생산이 불가능한 삶은 같은 학벌이라는 심리적 연결도 끊어내 버리고 모두를 파편화하고 있다. (중략) 지금은 학벌이 권력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끔은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다.”

그래, 이제 한 번 가난은 영원한 가난이 된 시대다. 조금이라도 덜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공인인증서와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가난을 경쟁하고, 증명해야 하는 시대다.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법

중산층이 붕괴되고, 사회 다수가 가난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지만 가난은 끝내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유는 대부분 단순하다. 가난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이라는 고통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은 쉽다. 가난한 이들과는 다른 나를 설정한다. 또 그렇기에 ‘나’는 절대 가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빈곤한 이들에게 붙는 꼬리표는 이렇다; 부도덕하고, 게으르며, 노력할 줄 모르고, 더럽고, 품격 없다.

양상은 다양하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임대세대와 비임대세대를 나누어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 가는 길마저도 차별시키고, 비임대세대의 부모가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아이와는 놀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병신 같다, 좆같다는 말이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순간, 청소년들은 더 이상 이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럴 때 이런 말을 아무런 문제 없이 대체하는 말이 바로 ‘거지 같다’는 말이다. 전 대통령님께서도 사랑하셨던 드라마 OST를 떠올려보자. “이 바보 같은 사랑, 이 거지 같은 사랑 계속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

ⓒ SBS <시크릿 가든>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여성이라면 김치녀가 되고 된장녀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라면 돈을 노리고 접근한 꽃뱀이 된다. 계급상승을 이뤄낸 이라면 ‘개천 냄새 난다’는 모욕을 듣는다. 남성이라면 ‘가난하고 못 배웠을수록 씹치남’ 같은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바로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곁에

가난은 혐오하고 불쾌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88올림픽 직전, 도시미관 및 환경정비를 빌미로 집을 잃었던 이들이, 지난 2010년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서울역에서 쫓겨나야 했던 홈리스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월가 점령 시위, 월 스트리트 ⓒHuffPost

사회 다수가 가난에 가까워지고 있다. 1%가 부의 99%를 독점하고, 99%가 남은 부의 1%를 공유한다는 말은 구호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중산층의 붕괴는 심화됐다. 소득은 양극화됐다. 가난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가난을 혐오하는 이들은 상위 1%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래에서 가난과 맞닿아 있는 이들이다.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이는 당신이며, 또 나이다. 가난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그들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해서 벌을 받아 가난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당신이 특별히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 상으로 가난을 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