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만들어지는 방법, [500일의 썸머]

Take me out tonight. Where there’s music and there’s people who are young and alive.

Driving in your car I never never want to go home because I haven’t got one anymore.

This is a story, a boy meets a girl

출근길 엘레베이터 안에서 여자를 마주쳤을 때, 남자의 헤드셋에서는 더 스미스(the Smith)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부터 여자에게 반해 있었고, 여자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 음악에 반응했다. 드디어,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머지 않아 회식 자리에서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고, 둘은 친구가 된다. 정확히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믿었지만,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그녀를, 옥토퍼스 가든을 좋아하는 그녀를,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그의 사랑을, 그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그를,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을 중시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But, this is not a love story

영화 [500일의 썸머] 속 썸머는 한때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일방적인 어장관리녀라 비판했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싫다.”는 말을 그저 (비)웃어 넘길 뿐이었다. <건축학개론> 속 수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썸머가 일방적이었던가. 그녀는 톰에게 몇 번을 반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톰은 여기에 대해 ‘동의하는 척’ 했다. 괜찮냐고 묻는 썸머에게 톰은 다시 수차례 괜찮다고 답했다. 톰과 썸머의 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은, ‘친구로도 괜찮다’는 대답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썸머는 톰에게 일종의 ‘이용 전 약관’을 건넨 셈이다. 주의사항과 이용 전 약관을 꼼꼼히 읽지 않고 동의 버튼을 누른 댓가는 처참하다. 대충 읽고 동의했다면, 그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톰은 오로지 썸머만 탓할 뿐이었다.

 

당신 곁에 머물다간 관계에 대하여

관계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한다. 그것은 연인 간의 관계일 수도, 혹은 친구 간의 관계일 수도, 가족 관계일 수도, 또는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 역시 흔히 목격한다. 다만 아쉽게도 그것이 썸머만의 탓일 수는 없다.

관계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낼 수 있는 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기에, 두 사람이 관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기에 관계에 대한 책임은 결코 누군가 한 명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연애, 우정, 가족… 모든 관계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녀)가 원하는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납치된 어린 아이라는 환상과 무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계는 두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화의 끝 무렵, 톰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해낸다. 여름(summer)이 가고, 가을(autumn)이 그에게 찾아온다. 여름은 아픔과 성장통의 시기이며, 가을은 수확과 추수의 시기이다. 지난 여름 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 톰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알 법이 없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다. 톰이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혼자서 정의하고, 혼자서 사랑하고, 혼자서 망쳐버리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 썸머와의 관계들을 통해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탓하고만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심연 네트워크,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까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니체의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서 이 말은 이렇게 변주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다면, 페이스북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뭐, 페이스북의 자리는 트위터가 대신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이 차지할 수도 있다.

각각의 서비스는 각각의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심연은 이용자들의 이용패턴(좋아요, 체류시간 등)을 바탕으로 그가 과연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컨텐츠에 반응할지 계산하고, 그럴만한 컨텐츠를 그의 뉴스피드에 띄워 내고야 만다. 대부분 적중한다. 빅데이터는 이제 여러분의 바로 옆에 있다.

좋아요는 곧 돈이 된다.

결국 그는 심연을 더욱 오랫동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만 담은 머스트 해브 심연. 그럴수록 심연은 그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테다. 어쩌면 그는 심연 속에서 동경하게 된 위대한 페북스타가 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관심에 만취한 채 배꼽에 소주를 담아 마실 수도 있다.

페이스북 안에서 ‘좋아요’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보이게 된다.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좋아요만 많이 받는다면 스폰서가 붙을 수도 있고, 광고를 받을 수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스타’다. 페이스북을 통한 유명세는 때로 TV를 압도한다.

괴물과 싸우고 있습니까

뭐, 페이스북에 골몰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을지 고민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실, 이 경구의 앞에는 더 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붙는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역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라는.

이 말 역시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바꿔볼 만하다. “누구든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은, 그 역시 조리돌림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이 모두가 정의의 사자다. 정의의 사자들은 쉽게 흥분한다. 막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정의의 사자들이 나서 이들을 재단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사람은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쉽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조리돌림을 위한 완벽한 매체다. 폐쇄성과 공개성과 전파력이 완벽히 상호보완된다. 뉴스피드에는 욕을 할 만한 사람이 캡쳐/공유/리트윗으로 계속해서 등장하고, 늘어나는 좋아요 숫자는 당신의 참여를 독려한다.

온갖 이유로 조리돌림이 이어진다.

덕분에 하루에 최소 한 명 이상은 광범위하고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다.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글 하나가 수백, 수천 명으로부터, 혹은 그 이상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었던 비난을 받게 한다.

그가 정말 비난 받을만한 일을 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망각되거나 무시된다. 물론 정말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다수의 사람이 한 명의 개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개인이 있었다

영화 <소셜포비아> 포스터

그 순간 개인은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셜포비아(2015)>가 좋은 예다. 트위터를 통한 조리돌림, 현피를 생중계한다던 아프리카 BJ와 압박을 받던 한 사람의 자살. 그리고 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한 네티즌의 자살 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당장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 또 어제 일어났다고 해도 아, 그래, 안타깝네-하고 넘길 만큼 있음직한 일이다.

당신이 정의를 위해 남긴 글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크의 모든 비난은 사형私刑이며, 즉결처형이다. 이 모순 앞에서 항상 망설여야 한다. 글을 쓰기 전 수십 번은 되물어야 한다. 맥락을 살피고, 말을 다듬어야 한다. 매번 팔짱을 낀 채 중립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신의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Christopher Nolan

한 면의 정의가 다른 쪽에서 보기에도 정의라는 법은 없다. 정의에는 쾌감이 없다. 정의는 늘 불쾌하고 불편한 축에 속한다. 당신이 내뱉는 말들이 즐겁고, 그로 인한 반응이 즐겁다면 당신은 아마 정의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자, 저 심연 속에서 분투하는 괴물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 그 역시 스스로를 정의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심지어 그 비난을 받게 될 사람이, 언젠가는 괴물이 된 당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