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뷰티 인사이드]

현실이 만든 어떤 이별

자고 일어나면 몸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우진. 그처럼 기묘한 몸을 가지게 된 건 청소년 때부터였다. 어느 순간 그랬다. 남자였다가 여자였다가, 노인이었다가 아이었다가, 백인이었다가 흑인이 된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별 수도 없다. 그런 몸에 적응할 수밖에. 덕분에 그의 집에는 수십, 어쩌면 수백의 옷과, 안경과, 렌즈와, 신발이 있다.

그는 가구를 만든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가구. 아마도 모든 ‘한 사람’이 되곤 하는 그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런 그가 한 사람에게 반한다. 이수라는 이름의 여자. 가구점에서 가구를 안내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느낀다. 그녀의 관점과 생각, 시선이 그를 끌어당긴다.

우진은 이수에게 스스로를 고백하고, 이수는 어렵게, 어렵게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수는 하루에 한 번 남자를 바꾸는 여자가 되고, 이수 주변에는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수 역시 우진을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녀는 매일 달라지는 우진의 모습을 알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의 긴 고통 끝에, 우진은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힘들고 아픈 이별.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 상처 입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상황은, 현실은 그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넌 날 이해 못해, 넌 나를 몰라

현실이 만드는 이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비단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몸이 없어도, 이별은 쉽다. ‘헤어지는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되기도 하고, 학벌 차이가 되기도 한다. 성적 지향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별이 무려 전체의 82.9%라는 이야기는 현실감 없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헤어짐은 강남의 사거리처럼, 트웬티스 타임라인)

우진을 ‘사회적 소수자’에 대입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성소수자이며 장애인이고, 빈곤하고, 저학력자이며,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산다. 그에게는 시간조차 없다. 덕분에 그와의 연애는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 인식과 관점의 차이와 부족한 시간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확실히 쉬운 연애는 아니다.

감정적 이별에는 책임이 있다. 누군가가 마음이 식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친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 때로는 한쪽이 잘못하고, 가끔은 서로 잘못한다. 이 경우 책임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 피타고라스가 요즘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황금비율이 아니라 이별의 책임비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경제적·사회적 이별에는 명백한 책임이 없다. 권태도, 싫증도 관계 외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별을 앞둔 커플에게 가장 힐난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도대체 왜 그래, 왜 날 이해 못 해줘,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그리고 이별.

 

그럼에도 아주 명확한 한가지

흔한 패턴이다. 잘 짚이지 않는 현실보다는 눈 앞의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훨씬 편하며 때로는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연애는 무척 사적이며, 개인적인 일처럼 여겨지니까. 표출할 곳을 찾을 데 없는 분노는 용암처럼 바로 앞을 향해 흘러나간다. 어쩌면 마음을 계속 참아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책망은 반성을 부르거나, 억울함을 만든다. 이런 이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지 않는다. 자신의 탓이 아닌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내면의 상처는 곪고 깊어지리라.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그 힐난은 꽤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 억울한 분노가 향할 방향은 또 어디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별 앞에서, 서로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현명한 일은 연애의 과정을 천천히 복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별은 어떤 갈등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갈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그 후 비로소 답은 명쾌해진다.

내가 탓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 곧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각기 애썼다는 것을. 다만 그를 극복하기에 우리 둘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심연 네트워크,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까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니체의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서 이 말은 이렇게 변주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다면, 페이스북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뭐, 페이스북의 자리는 트위터가 대신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이 차지할 수도 있다.

각각의 서비스는 각각의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심연은 이용자들의 이용패턴(좋아요, 체류시간 등)을 바탕으로 그가 과연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컨텐츠에 반응할지 계산하고, 그럴만한 컨텐츠를 그의 뉴스피드에 띄워 내고야 만다. 대부분 적중한다. 빅데이터는 이제 여러분의 바로 옆에 있다.

좋아요는 곧 돈이 된다.

결국 그는 심연을 더욱 오랫동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만 담은 머스트 해브 심연. 그럴수록 심연은 그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테다. 어쩌면 그는 심연 속에서 동경하게 된 위대한 페북스타가 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관심에 만취한 채 배꼽에 소주를 담아 마실 수도 있다.

페이스북 안에서 ‘좋아요’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보이게 된다.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좋아요만 많이 받는다면 스폰서가 붙을 수도 있고, 광고를 받을 수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스타’다. 페이스북을 통한 유명세는 때로 TV를 압도한다.

괴물과 싸우고 있습니까

뭐, 페이스북에 골몰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을지 고민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실, 이 경구의 앞에는 더 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붙는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역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라는.

이 말 역시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바꿔볼 만하다. “누구든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은, 그 역시 조리돌림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이 모두가 정의의 사자다. 정의의 사자들은 쉽게 흥분한다. 막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정의의 사자들이 나서 이들을 재단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사람은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쉽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조리돌림을 위한 완벽한 매체다. 폐쇄성과 공개성과 전파력이 완벽히 상호보완된다. 뉴스피드에는 욕을 할 만한 사람이 캡쳐/공유/리트윗으로 계속해서 등장하고, 늘어나는 좋아요 숫자는 당신의 참여를 독려한다.

온갖 이유로 조리돌림이 이어진다.

덕분에 하루에 최소 한 명 이상은 광범위하고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다.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글 하나가 수백, 수천 명으로부터, 혹은 그 이상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었던 비난을 받게 한다.

그가 정말 비난 받을만한 일을 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망각되거나 무시된다. 물론 정말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다수의 사람이 한 명의 개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개인이 있었다

영화 <소셜포비아> 포스터

그 순간 개인은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셜포비아(2015)>가 좋은 예다. 트위터를 통한 조리돌림, 현피를 생중계한다던 아프리카 BJ와 압박을 받던 한 사람의 자살. 그리고 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한 네티즌의 자살 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당장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 또 어제 일어났다고 해도 아, 그래, 안타깝네-하고 넘길 만큼 있음직한 일이다.

당신이 정의를 위해 남긴 글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크의 모든 비난은 사형私刑이며, 즉결처형이다. 이 모순 앞에서 항상 망설여야 한다. 글을 쓰기 전 수십 번은 되물어야 한다. 맥락을 살피고, 말을 다듬어야 한다. 매번 팔짱을 낀 채 중립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신의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Christopher Nolan

한 면의 정의가 다른 쪽에서 보기에도 정의라는 법은 없다. 정의에는 쾌감이 없다. 정의는 늘 불쾌하고 불편한 축에 속한다. 당신이 내뱉는 말들이 즐겁고, 그로 인한 반응이 즐겁다면 당신은 아마 정의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자, 저 심연 속에서 분투하는 괴물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 그 역시 스스로를 정의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심지어 그 비난을 받게 될 사람이, 언젠가는 괴물이 된 당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