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나는 노래 – #01 1년 정거장

어떤 음악에는 어떤 추억이 깃들어 있다. 이를테면 그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던 순간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김동률의 목소리, 변하지 않는 사랑을 다짐하며 불렀던 유재하의 노래 같은 것들. 그래서 어떤 음악은 듣는 순간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어떤 시간이 너무나 또렷하게 생각나게 한다. 그때의 공간, 그때의 온도, 그때의 맛, 그때의 냄새까지. 그래. 어떤 음악에서는 가끔 냄새가 난다.


 

고등학교 1학년, 나는 은따였다

사실 왕따와 크게 구분 갈 것도 없다. 때린다던가 교과서를 숨기는 적극적이며 물리적인 따돌림은 없었지만, 나는 번번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야 했고, 시답지 않은 이유로 비난의 눈초리를 받기에 십상이었다. 뭘 했길래 그렇게 되었느냐고? 글쎄. 여느 왕따가 그렇듯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어떨 때는 쎈 척을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오, 세상에. 무얼 얻기 위해 쎈 척씩이나 했다는 건가. 나는 그저 딜레이가 많고, 경험이 적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어오는 동급생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쳐다본 게 다였다. 그 이후 나는 ‘쎈 척을 하는 애’가 됐다. 가진 것 이상의 허세를 떨며 누군가를 깔아뭉갠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마치 그 아이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런 걸 만들었더랬다.

어떨 때는 내 발음이 이유가 됐다. 힙합을 좋아했다. 따라 부르기도 했고, 가끔은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Soul Company. P&Q나 키비, 에픽하이나 다이나믹 듀오 괕은. 그때 듣던 음악들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내 발음은 어딘가 각이 져 있었고, 톤의 변화가 적었다. 그 발음이 위의 이유와 맞물려 나는 그 1년 동안 힙합이나 좋아하며, 쎈 척을 하는 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때의 힙합은 철저한 비주류 장르였고, the Quiett의 <Back on the Beats Mixtape Vol. 1>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음반이었다.

 

나를 따에서 벗어나게 한 것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문이과가 갈리며 나를 괴롭히던 이들과는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고 남들 앞에 나서 무언가를 읽는 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행여 이상하게 들릴까 봐, 내 발음이 틀린 것일까 봐. 항상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어느 날.

G-Dragon의 1집, [Heartbreaker]가 발매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앨범이었다. 그해 무려 128,755장이 판매되어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차지했지만, 타이틀곡 Heartbreaker는 Flo Rida의 Right Round라는 곡의 플로우를 표절했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얼토당토않은 의혹1)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어떤 논란이 있건, 나는 그 앨범에 있는 곡들을 열심히 따라 불렀다. 타이틀곡인 Heartbreaker, 서브타이틀인 Breath, 묘한 멜로디가 인상적이었던 Butterfly와 1년 정거장까지. 부르고 부르고, 다시 불렀다. 빅뱅의 팬도 아니었던 내가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내 안에 남은 트라우마를 씻어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들 앞에서 위축되는 그 느낌이 싫어서,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 억양을 지워버리고 싶어서. 톤의 높낮이 변화가 많고, 조금 더 당당해 보이는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발음과 억양으로 놀림 받지 않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1년 정거장 세상이 우릴

그런 의미에서 G-Dragon의 [Heartbreaker]는 내게 꽤 특별하고 소중한 음반이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을지라도 쉽게 잊히지는 않을 음반. 내가 가진 우울을 잠시나마 이겨낼 수 있게 했던 음악이니까. 그런데 왜 타이틀이나 후속곡도 아니고, rap이 아니라 sing이 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년 정거장을 골랐느냐고?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1년 정거장’은 자신을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부르는 G-Dragon의 팬 송이다. 이 곡의 가사에는 팬들을 향한 그의 절절한 마음이 녹아 있다. “널 일으켜주고 싶어 but 그럴 힘이 없어 이런 내 자신이 싫어 긴 기다림에 지쳐 비록 몸은 멀리 있더라도 맘은 변치 말자고. 이건 헤어짐이 아닌걸, 아주 잠깐의 휴식인걸.” 사랑하는 사람과 아주 오랜 기간 떨어져 있게 된 한 사람의 마음을 잘 그려낸 가사가 인상적이다.

추억 속에 묻어 두었던 이 노래의 가사를 다시 꺼내게 된 건, 어떤 연애 때문이었다. 그 연애는 서툴렀고, 급박했고, 낯설었고, 어려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주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했고, 나는 이를 잘 견디지 못했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그 오랜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안 가는 그런 느낌. 나는 그쯤 이 노래를 즐겨 들었다. 말할 수가 없어. 널 붙잡을 수가 없어. 참았던 눈물을 떨리던 입술을 보고도 모른 척해야 해.

내 신경은 오로지 그 연애에 쏠려 있었다. 매일 같이 그리워했고 매일 같이 울었다. 그런 날들의 한복판에서 어떤 친구를 만났다. 현명한 친구였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다. 내가 많은 걸 털어놓지 않았지만 그는 내 말에 공감해주었다. 꽤 자주 만났고, 그 친구와 만난다는 것 자체가 안정감을 주었다.

 

최루액 냄새가 나는 노래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집회에 갔다. 휴일이었고, 세월호가 침몰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집회를 마치고 행진이 있었다. 안국역쯤 갔을까. 얼마 안 가 경찰버스가 시민들을 에워쌌다. 최루액이 뒤섞인 물대포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되었다. 매캐한 냄새가 머리를 울렸다. 연신 기침과 재채기가 나왔다.

 

최루액은 시민들의 얼굴을 향해 분사되었다. ⓒ 프레시안 최형락

시간이 흘러 새벽에 가까워졌다. 그 집회에 그 친구 역시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 만날까. 그래. 어디야. 나는 맥도날드 앞. 그럼 거기서 보자. 여전히 경찰버스는 참가자들을 막고 있었고, 도로에는 최루액 냄새가 가득했다. 눈에 들어간 최루액을 씻어내고 츄러스를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단 설탕 내음이 입을 매웠다. 다시 길거리에 나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

그 친구는 선우정아의 ‘비온다’를 들려주었다. 비 온다. 비 온다. 비 온다. 모두 입을 벌려. 왠지 최루액 쏟아지는 곳에서 들을 노래는 아닌 것 같다. 그치. 요새 자주 듣는 노래야. 뭔데. 지드래곤. 틀어봐. 내가 서 있는 1년 정거장. 세상이 우릴 질투했다고 생각해. 1년 정거장. 그곳에선 널 느낄 수 있어. 왜 듣는지 알겠다. 그치. 완전 소년 감성이네. 그런가. 그런 대화를 몇 번 주고받았다.

그대가 없는 텅 빈 정거장. 세상이 우릴 질투했다고 생각해. 몇 마디를 더 흥얼거렸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까끌한 설탕 냄새에 섞인 최루액의 냄새를 맡는다. 안타깝게도 썩 좋은 냄새는 아닌 셈이다.

 

 

1) 트랩이 유행하던 14-15년, 얼마나 식상한 플로우가 양산됐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 랩들의)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표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자 경기도지사를 바라며

“저희가 잘 안 들립니다.”

“저희가 잘 안 들립니다.”

13일 늦은 저녁,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은 당선 소감을 묻는 MBC와의 인터뷰를 이렇게 끝냈다. 인이어가 잘 안 들린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잘 들리지 않아서가 아님은 그 방송을 보는 모든 이가 알 수 있었다. MBC 이전의 몇 차례 당선 인터뷰에서 이재명 당선인은 한 질문에 대해 유독 날카롭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바로 한 배우와의 스캔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배우는 2010년부터 꾸준히 이재명 당선인과의 관계를 주장해왔고, 이 당선인은 이를 꾸준히 부인해 왔다. 오래된 관계였다. 증거가 있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곧 증거 없음은 주장을 쉽게 기각해버릴 증거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의혹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재명 도지사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같은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노컷TV

그래서였을까. 이재명 당선인은 인터뷰 현장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안 돼! 엉뚱한 질문을 자꾸 해서 안 돼! 약속을 어기기 때문에 다 인터뷰 취소해! 여기까지만 하고, 이것도 인터뷰하다 딴 얘기하면 끊어버릴 거야. 내가 끊어버릴 거야. 예의가 없어. 싹 다 어겼어. 예의가 없어. 다 커트야!”

“대변인! 이거 하고 더 하지 마!”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이재명 당선인은 인터뷰 질문에 대해 방송사와 어떤 약속을 했고, 언론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 이재명 당선인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는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듣고 싶은 질문만 듣겠다는 것,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매번 사전에 협의된 질문만 받았고, 짜인 답변만 했다.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 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나? 저 중동에 갔다고.” 그렇게 해서 나온 답변조차 하나하나 주옥같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재명 당선인이 박 전 대통령이다, 뭐 그런 소리는 아닙니다… ⓒ한국일보

언론은 정해진 질문을 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다. 공익에 부합하고, 시민이 원한다면 어떤 자리에서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청와대 기자단이 당시 ‘기레기’라며 비판받았던 이유 역시, 언론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질문만 했기 때문이다. 권력과 유착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불필요한 예의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그래서는 안 되고, 정치인은 언론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디서 고소한 냄새 안 나요? 경기도청 쪽인가?

이재명 당선인은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여기는 것을 대할 때, 거리낌이 없었다. 지난 17년 1월, 자신에 대한 허위보도를 한 TV조선에 대해 형사고소하는 한편, “폐간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뿐만 아니다. 자신에 대해 일베 관련 의혹을 제기한 네티즌 4명을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에서 고소한 바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재명은 성남시장으로 재직 당시 LH 공사와의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일어났던 시위의 참가자 70명을 공무집행방해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재명은 지난 대선 경선 과정 이전부터 ‘고소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SBS

언급한 부분이 전부는 아니지만, 기사의 여백이 너무 좁아서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당선인이 변호사 출신이라 법을 잘 알고 계신다는 점은 잘 알겠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이가 시민을 향해 법을 휘두를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의사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90여 개 나라의 인권 실태를 분석한 2017년 연례 보고서에서, 현행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자. 세계적으로 명예훼손죄는, 권력의 반대편에 선 이들을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2017년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한국 언론 자유지수를 보자. 63위다. 시민들이 나서 주권을 쟁취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어울리지 않는 순위다. 낮은 점수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명예훼손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론인이 스스로를 자기검열 해왔다는 것이다.

2018년 발표된 순위에서 한국은 43위로 무려 20계단을 뛰어 올랐다. 문재인 정부의 언론이 이전보다 더욱 자유를 얻게 된 것은 분명하다. ⓒ더팩트

이재명 시장은 이전에도 여러 번, 여러 법을 자신의 반대편에 선 이들의 표현을 억압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해 왔다. 이는 민주주의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가 의사를 결정한다’는 데에 있지 않다. 여러 의견과 주장이 자유롭게 발화되고, 그 과정에서 의사를 결정할 다수를 설득시키는 데에 있다.

“비판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용할 것인가.”

그가 진정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그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먼저 기울였어야 한다. 자, MBC가 이재명 당선인에게 던지려는 질문이 원래 뭐였는지 떠올려보자.

ⓒ박성제 MBC 기자 페이스북

“선거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는데 앞으로 경기도지사가 된 후 비판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용할 것인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비판하는 이를 처벌하는 대신 설득하고 대화하는 것. 그러나 그는 이 질문을 끝까지 듣지조차 않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경기도를 한반도 평화번영 시대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지역 화폐와 무상복지 사업을 연계해 복지 체감도를 높이겠다고 했다. 청년 배당, 산후조리를 지역 화폐로 주어 전통시장과 골목 상권에서 쓰이도록 하겠다고 했다.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했다. 나도 경기도민으로서, 그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디 민주주의의 정신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진이 일어난 이토록 다양한 이유들

아, 지진. 그것은 지구가 준 선물

2017년 11월 15일 오후, 지진이 일어났다. 기상청 관측 이래 두 번째 규모. 부상자 82명과 이재민 1,797명을 남긴 기록적인 재해였다. 물론 이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주민들은 커다란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리고

SBS가 교육부의 수능 연기를 발표하고 있다는 것을 한겨레가 보도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여기에…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수능이 미뤄졌다. 2006년 APEC, 2010년 G20 이래로 세 번째 연기. 그러나 수능 전날에 연기가 결정된 것은 초유의 일이다. 대학 입시를 목숨만큼이나 중요히 여기는 나라에서, 또 대학 입시 실패가 죽음으로 연결되기도 하는 나라에서, 이는 꽤 큰 혼란을 불러올만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어떤 이들에게 이는 선물이기도 했다. 몇몇 사교육 업체는 이를 ‘하늘이 준 선물’이라 불렀고, 성급히 ‘지진 특강’을 열었다. 학생들에게는 완벽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지구가 준 기회라 홍보했다. 물론, 지구가 또는 하늘이 공부가 부족했던 학생들을 위해 지진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진이 왜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를 그보다도 더욱 전근대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 말이다.

ⓒ뉴스1

하나. 자유한국당 류여해 최고위원은 17일 열린 당 최고위원회에서 이번 지진에 대해 “문 정부에 대해 하늘이 준 준엄한 경고, 그리고 천심이라고 하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천심’이라니. 그에 따르면 아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제사장이 틀림 없다. 신이시여, 지진을 멈춰주소서. 비를 내려주소서. 아, 이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통령은 역시 최순실이었다는 말인가.

 

ⓒ목포주안교회 유튜브

둘. 뉴스엔조이의 보도에 따르면, 영암삼호교회 이형만 목사는 이번 지진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종교계에 과세 문다 하니까 포항에서 지진이 났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다 세금을 내라 하나. 하나님께서 가만 있지 않는다. 하나님을 건드릴 때, 국가에 위기가 바로 다가오는 거다. 그걸 체감해야 한다.” 얼쑤. 자신에게 세금 내라 했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 된다. 하나님이 한국에 목사로 현신해 있으신 줄은 제가 미처 몰라뵙고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이고.

셋. 포항 한동대학교는 이번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이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 놀랍게도 한동대 관련 SNS와 단톡방은 성소수자 혐오로 들끓었다. 주된 내용은 이렇다. 지진이 발생한 이유는, 한동대 인권법학회에서 주최할 예정이던 임보라 목사 초빙 강연이라는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해온 목사를 학교에 데려오려 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 세상에, 그쪽 아버지 참 바쁘시네.

 

이토록 흔한 반지성주의

그들에게 지진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논리적 이유’는 이토록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할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투사가 우선시될 뿐. 논리와 이성을 버리고, 직관과 경험, 감정을 우선시하는 것, 우리는 이를 바로 반지성주의라 칭한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지식과 지성, 앎과 논리보다 분노와 적대, 감정이 중요시되는 사회, 이런 토양에서는 이를 이용하는 파시즘과 전체주의만이 싹틀 뿐이다. 나치가 그랬고, 매카시즘이 그러했듯이.

위의 사례들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지성주의는 더욱 더 비근하게, 또 숱하게 사람들 곁에서 움직이고 있다. 때로는 지성의 탈을 쓰고서, 내 편에 가까운 지식만, 나를 해하지 않는 지성만이 지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던 어용 지식인, 어용 시민이라는 말도 크게는 반지성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안 된다.

지성과 지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반지성과 반지성이 대결하는 구도 아래서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갈등과 적대, 불신과 냉소 뿐이다. 공부하고, 또 연구하고 나와는 다른 생각을 지닌 이를 ‘천벌 받을 사람’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거기서 모든 대화와 이해가 시작된다.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뷰티 인사이드]

현실이 만든 어떤 이별

자고 일어나면 몸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우진. 그처럼 기묘한 몸을 가지게 된 건 청소년 때부터였다. 어느 순간 그랬다. 남자였다가 여자였다가, 노인이었다가 아이었다가, 백인이었다가 흑인이 된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별 수도 없다. 그런 몸에 적응할 수밖에. 덕분에 그의 집에는 수십, 어쩌면 수백의 옷과, 안경과, 렌즈와, 신발이 있다.

그는 가구를 만든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가구. 아마도 모든 ‘한 사람’이 되곤 하는 그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런 그가 한 사람에게 반한다. 이수라는 이름의 여자. 가구점에서 가구를 안내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느낀다. 그녀의 관점과 생각, 시선이 그를 끌어당긴다.

우진은 이수에게 스스로를 고백하고, 이수는 어렵게, 어렵게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수는 하루에 한 번 남자를 바꾸는 여자가 되고, 이수 주변에는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수 역시 우진을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녀는 매일 달라지는 우진의 모습을 알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의 긴 고통 끝에, 우진은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힘들고 아픈 이별.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 상처 입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상황은, 현실은 그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넌 날 이해 못해, 넌 나를 몰라

현실이 만드는 이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비단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몸이 없어도, 이별은 쉽다. ‘헤어지는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되기도 하고, 학벌 차이가 되기도 한다. 성적 지향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별이 무려 전체의 82.9%라는 이야기는 현실감 없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헤어짐은 강남의 사거리처럼, 트웬티스 타임라인)

우진을 ‘사회적 소수자’에 대입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성소수자이며 장애인이고, 빈곤하고, 저학력자이며,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산다. 그에게는 시간조차 없다. 덕분에 그와의 연애는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 인식과 관점의 차이와 부족한 시간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확실히 쉬운 연애는 아니다.

감정적 이별에는 책임이 있다. 누군가가 마음이 식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친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 때로는 한쪽이 잘못하고, 가끔은 서로 잘못한다. 이 경우 책임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 피타고라스가 요즘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황금비율이 아니라 이별의 책임비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경제적·사회적 이별에는 명백한 책임이 없다. 권태도, 싫증도 관계 외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별을 앞둔 커플에게 가장 힐난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도대체 왜 그래, 왜 날 이해 못 해줘,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그리고 이별.

 

그럼에도 아주 명확한 한가지

흔한 패턴이다. 잘 짚이지 않는 현실보다는 눈 앞의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훨씬 편하며 때로는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연애는 무척 사적이며, 개인적인 일처럼 여겨지니까. 표출할 곳을 찾을 데 없는 분노는 용암처럼 바로 앞을 향해 흘러나간다. 어쩌면 마음을 계속 참아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책망은 반성을 부르거나, 억울함을 만든다. 이런 이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지 않는다. 자신의 탓이 아닌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내면의 상처는 곪고 깊어지리라.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그 힐난은 꽤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 억울한 분노가 향할 방향은 또 어디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별 앞에서, 서로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현명한 일은 연애의 과정을 천천히 복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별은 어떤 갈등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갈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그 후 비로소 답은 명쾌해진다.

내가 탓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 곧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각기 애썼다는 것을. 다만 그를 극복하기에 우리 둘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관계가 만들어지는 방법, [500일의 썸머]

Take me out tonight. Where there’s music and there’s people who are young and alive.

Driving in your car I never never want to go home because I haven’t got one anymore.

This is a story, a boy meets a girl

출근길 엘레베이터 안에서 여자를 마주쳤을 때, 남자의 헤드셋에서는 더 스미스(the Smith)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부터 여자에게 반해 있었고, 여자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 음악에 반응했다. 드디어,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머지 않아 회식 자리에서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고, 둘은 친구가 된다. 정확히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믿었지만,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그녀를, 옥토퍼스 가든을 좋아하는 그녀를,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그의 사랑을, 그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그를,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을 중시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But, this is not a love story

영화 [500일의 썸머] 속 썸머는 한때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일방적인 어장관리녀라 비판했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싫다.”는 말을 그저 (비)웃어 넘길 뿐이었다. <건축학개론> 속 수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썸머가 일방적이었던가. 그녀는 톰에게 몇 번을 반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톰은 여기에 대해 ‘동의하는 척’ 했다. 괜찮냐고 묻는 썸머에게 톰은 다시 수차례 괜찮다고 답했다. 톰과 썸머의 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은, ‘친구로도 괜찮다’는 대답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썸머는 톰에게 일종의 ‘이용 전 약관’을 건넨 셈이다. 주의사항과 이용 전 약관을 꼼꼼히 읽지 않고 동의 버튼을 누른 댓가는 처참하다. 대충 읽고 동의했다면, 그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톰은 오로지 썸머만 탓할 뿐이었다.

 

당신 곁에 머물다간 관계에 대하여

관계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한다. 그것은 연인 간의 관계일 수도, 혹은 친구 간의 관계일 수도, 가족 관계일 수도, 또는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 역시 흔히 목격한다. 다만 아쉽게도 그것이 썸머만의 탓일 수는 없다.

관계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낼 수 있는 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기에, 두 사람이 관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기에 관계에 대한 책임은 결코 누군가 한 명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연애, 우정, 가족… 모든 관계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녀)가 원하는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납치된 어린 아이라는 환상과 무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계는 두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화의 끝 무렵, 톰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해낸다. 여름(summer)이 가고, 가을(autumn)이 그에게 찾아온다. 여름은 아픔과 성장통의 시기이며, 가을은 수확과 추수의 시기이다. 지난 여름 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 톰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알 법이 없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다. 톰이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혼자서 정의하고, 혼자서 사랑하고, 혼자서 망쳐버리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 썸머와의 관계들을 통해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탓하고만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산책(Walk Alone)

산책 by Lupinnut

 

함께 걷던 그 길을 나 혼자 걸을 때 어색해진 손목으로 팔짱을 꼈지

차가워진 옷깃에 뭣도 닿지 않아서 애써 덤덤한 척 시선을 먼 하늘에 뒀지

가득 찬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가 술 한 잔 할 사람 없어 고개를 젓네

그래도 난 괜찮아 여기 혼자 왔는걸 네가 내 것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네

 

워우워어 모자란 것이 많아서 빈자리를 채우는 게 버거웠겠지

워우워어 모난 점이 너무 많아서 찔리지 않으려 숨어야 했겠지

 

적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대체 내가 누군지 잘 몰랐었어

몇 번의 실수들과 몇 번의 반성들과 몇 번의 반복들이 날 설명했지

지키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손에 쥘 것이라곤 내 손뿐이네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따가운 시선에 나 눈을 감았네

 

워우워어 모자란 것이 많아서 빈자리를 채우는 게 버거웠겠지

워우워어 모난 점이 너무 많아서 찔리지 않으려 숨어야 했겠지

간단하게 떠오른 멜로디를 모티브 삼아 간단한 코드 진행 위에 쓰워 봤습니다. 아이폰7과 개러지 밴드로 작업했습니다.

가난의 맛

대개 궁하다. 궁상 맞게 또 컵라면 이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다. 학식 먹기 싫다고 요 앞에 식당에 가자는 친구 말에 돈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게 부끄럽지만 별 수 없다. 벌고 또 벌지만 모을 새도 없이 잔액부족.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지금이야 좀 낫다. 적어도 월세나 생활비는 나가지 않는다. 집에만 붙어 있는다면 굶을 일은 없다. 공과금이 미납되었다고 전기가 끊길 수 있다는 독촉장은 날아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알바비가 들어왔다. 이중 대부분은 지난달 교통비, 얼마는 큰맘 먹고 할부로 샀던 가구, 또 얼마는 빌렸던 돈을 갚는 데 쓰일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또 당분간은 빈털터리다. 어머니가 물었다. “혹시 월급 들어올 때 안 됐니.” 어떻게 또 귀신같이 아셨다. 치킨이라도 사란다. 알겠다고 했다. 옷을 챙겨 입고 동네 치킨 집으로 향했다.

테이크 아웃은 천 원 할인인 곳이다. 배달보다 직접 사가는 게 싸다. 네 가족 다 먹을 걸 생각하면 웬만한 크기는 안 된다. “저기 2번 세트랑요, 혹시 콜라 큰 걸로 바꾸면 얼마인가요?” 20분 정도를 멍하니 앉아 조리와 포장을 기다렸다. <썰전>을 잠시 보다가 <백종원의 푸드트럭>으로 눈을 돌렸다. 백종원이 맛이 없는 푸드트럭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을 때쯤

“포장 다 됐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차, 서비스직에서 일하다 보면 이게 문제다. 감사합니다의 뒤에는 어김없이 안녕히 가라는 말이 붙는다. 가긴 어딜 가, 내가 가야지. 포장된 치킨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러다 기껏 산 치킨 다 젖겠네. 우산은 들고 나오지 않았지만 굳이 뛰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2만원? 그렇게 비싸니? 치킨 값이 오르긴 올랐네.” “그래도 맛은 있네.” 뭐 그런 실없는 대화가 오가고, 나는 헤헤 하고 웃는다. 그래도 넷이 먹기는 좀 부족한 양이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먹는 게 중요하다.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잠시 두드렸다. 딱히 쓸 이야기가 생각 나지는 않는다.

두 시간, 세 시간쯤 지났을까.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식탁에는 아까 큰 사이즈로 바꿔 산 콜라가 사 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펩시콜라. 김이 빠진 채 미지근한 단 맛이 목구멍으로 쏟아진다. 그 맛, 그 맛. 익숙한 맛이다.

불현듯 생각나는 어떤 장면. 오후 두 시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반지하방, 큼큼한 냄새, 주말인데도 밀린 일을 하느라 새벽에나 잠들었던 어느 날. 쌀이 다 떨어져 시켰던, 냉장고에 넣어둬 눅눅해진 피자 한 조각과 함께 마셨던 콜라와 똑같은 그 맛.

그 맛은, 가난의 맛이다. 돈이 너무 없었던 날, 월급을 받았지만 몇 달 밀린 월세와 공과금, 카드값으로 다 나가버린 그날, 쓸 수 있는 돈이 5만원 정도 남아서 탕진이라도 해버리자 싶어서 시켰던 치킨에 딸려왔던 콜라가 생각나는 맛.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서 편의점 기프티콘으로 샀던 도시락에 딸려 있던 콜라 한 캔이 생각나는 맛, 출근을 했다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법인카드로 사는 밥을 먹을 수 없었던 날, 반쯤 남은 생라면을 부숴 먹으며 마셨던, 생수통에 담겨 있던 김 빠진 사이다가 생각나는 맛.

그 맛은 가난의 맛이다. 나는 김 빠진 펩시콜라에서 가난을 느낀다. 곰팡이의 냄새를 느낀다. 햇빛이 비추지 않았던 그 방, 환풍이 되지 않았던 반지하방을 느낀다. 수도세를 독촉하던 문자를 느낀다. 후불교통카드가 정지됐다는 문자를 느낀다. 그 맛은 여실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