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것들에게서 나는 냄새

해당 게시물에는 영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감상하시지 않은 분들 중 영화 내용 및 결론에 대한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말이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이 자연스레 몸으로 느끼는 혐오감을 고백한다. 그는 이어 이렇게 진술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가난한 이에게는 냄새가 난다. 아니, 악취가 난다. 향수나 디퓨저, 캔들로도 쉽게 가릴 수 없다. 뼛속 깊이 새겨지고, 장기에 깊게 배인 냄새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는 이런 냄새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이 아래에서 부리는 이들이 필요 이상으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싫어하는 박 사장(이선균)은 그의 기사 기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다른 건 선을 넘을 듯 안 넘을 듯 결국 안 넘어서 좋은데, 냄새가 선을 넘어.”

그는 기택의 냄새를 이런 단어를 들어 설명한다. 노인 냄새,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행주 삶는 냄새,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그는 박 사장과 연교가 냄새를 언급할 때마다 스스로의 옷에서 냄새를 맡으려 애쓴다. 그는 스스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반지하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환경에 이미 깊게 밴 냄새이기 때문이다.

 

반지하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분명 박 사장의 집에서도, 그의 가족들에게서도 어떤 냄새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냄새는 선을 넘지 않는다. 부유한 자의 냄새는 달콤하고, 향기롭고, 은은하다. 하층 계급의 냄새는 악취가 되지만 상층 계급의 냄새는 향이 된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집은 비릿한 곰팡이 냄새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거실의 통유리로 햇살이 쏟아지는 박 사장의 집과 반지하인 기택의 집을 비교하며 이것이 “빈부격차의 정점”이라고 말한다.

 

다송이 기택네 식구더러 ‘같은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했던 일을 두고 그들은 고민을 시작한다. 섬유유연제를 바꾸어야 하나, 다 다른 걸 써야 하나 하고. 그러나 기정은 그 냄새가 “반지하 냄새”라며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 냄새가 가시지 않을 것이라 설파한다. 실로 그렇다. 10평 남짓한 반지하방에서 자취하던 시절, 온 집안의 벽지에는 곰팡이가 눌러 붙었다. 벽지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내 몸에도, 식기와 가구에도, 옷에도 그 꿉꿉한 냄새가 들러 붙었다. 꽤 비싼 디퓨저를 두어봤지만, 그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아마 집을 바꾸더라도 그 냄새는 꽤 오랫동안 그들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들의 옷과 가구와 몸에 기생하면서. 그 냄새가 단지 반지하 방에서 풍기던 비릿함이었을리는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아프기 마련이다. 병원에 가기조차 꺼린다.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두려워서, 검진에 드는 비용조차 아까워서.

 

냄새의 아비투스

입 냄새의 80%는 설태, 충치, 치석, 치주염과 같은 치과 질환으로 발생한다. 호흡장기나 소화장기에 질병 또한 마찬가지다. 장과 간장 사이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체내 영양 흡수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혈액으로 흡수되면 구취나 체취가 생겨난다. 간장 기능이 저하되면 냄새의 원인 물질이 혈류를 타고 온몸을 흘러 다닌다. 가난한 자는 냄새의 원인을 찾을 기회조차 없다.

 

씻는 습관조차 가난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물값이 아까워 매일 샤워하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몸을 씻을 온수란 것은 찬 물을 어떻게든 끓여서 겨우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니, 어떤 이들에게는 씻을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냄새를 씻어내지 못한 이들은 결국 ‘가난한 티’를 내게 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건 단지 ‘자본’이 아님을 설명하며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구별짓기) 이 문화자본은 인간의 몸에 깊게 베인 생활습관과 취향, 말투와 인지 능력을 통해 나타난다. 학력과 자격을 뜻하는 사회자본, 인맥을 의미하는 사회관계자본 또한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 짓는 단서다. 기태의 가족은 사회관계자본과 사회자본은 그럴 듯하게 속여냈지만, 이 냄새라는 아비투스는 쉽게 바꾸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계급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매커니즘이다. 졸부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하더라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무산 계급의 촌티를 쉽사리 벗어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생선용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할 줄도 모르며, 자기의 페라리 뒷유리창에 원숭이 인형을 매달아 둘 것이고, 전용제트기의 계기판에는 성 크리스토포로의 조각상을 올려 놓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계급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매커니즘이다. 가난한 이에게만 나는 이 냄새는, 아주 잔인한 것이다.

 

근근이 버텨볼 뿐이다

이야기의 종점에서, 기택은 박 사장 저택의 지하로 숨어들고 기우는 아버지를 구해내기 위하여 부자가 되어 그 집을 사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변변한 학벌도 없는 그가 학벌조차 실패하는 시대에 그만큼의 돈을 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수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단한 운이 따라야 할 것이다. 로또 한 번 당첨되는 정도로는 그 집을 살 수 없다. 아마 관객도, 감독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가난을 벗어나 부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들리는 이야기이다. 아마, 안 될 것이라고. 영화 속 대만 카스테라 집을 열었던 기택과 근세 역시 모두 비슷한 꿈을 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방공호를 향해 내려가는 계단처럼 끝까지 곤두박질칠 뿐.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대답은 원론적일 뿐, 현실적이지는 못하다. 대개 우리는 기택과 근세처럼 적대적일 뿐이다. 우리는 똑같이 대만 카스테라 집을 열 것이고, 함께 망할 것이며, 서로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골몰할 것이며 또 그 이후에도 똑같이 가난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은 채로 근근이 버텨볼 뿐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은 채로 근근이 버텨볼 뿐이다.

 

민주주의자 경기도지사를 바라며

“저희가 잘 안 들립니다.”

“저희가 잘 안 들립니다.”

13일 늦은 저녁,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은 당선 소감을 묻는 MBC와의 인터뷰를 이렇게 끝냈다. 인이어가 잘 안 들린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잘 들리지 않아서가 아님은 그 방송을 보는 모든 이가 알 수 있었다. MBC 이전의 몇 차례 당선 인터뷰에서 이재명 당선인은 한 질문에 대해 유독 날카롭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바로 한 배우와의 스캔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배우는 2010년부터 꾸준히 이재명 당선인과의 관계를 주장해왔고, 이 당선인은 이를 꾸준히 부인해 왔다. 오래된 관계였다. 증거가 있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곧 증거 없음은 주장을 쉽게 기각해버릴 증거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의혹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재명 도지사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같은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노컷TV

그래서였을까. 이재명 당선인은 인터뷰 현장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안 돼! 엉뚱한 질문을 자꾸 해서 안 돼! 약속을 어기기 때문에 다 인터뷰 취소해! 여기까지만 하고, 이것도 인터뷰하다 딴 얘기하면 끊어버릴 거야. 내가 끊어버릴 거야. 예의가 없어. 싹 다 어겼어. 예의가 없어. 다 커트야!”

“대변인! 이거 하고 더 하지 마!”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이재명 당선인은 인터뷰 질문에 대해 방송사와 어떤 약속을 했고, 언론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 이재명 당선인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는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듣고 싶은 질문만 듣겠다는 것,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매번 사전에 협의된 질문만 받았고, 짜인 답변만 했다.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 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나? 저 중동에 갔다고.” 그렇게 해서 나온 답변조차 하나하나 주옥같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재명 당선인이 박 전 대통령이다, 뭐 그런 소리는 아닙니다… ⓒ한국일보

언론은 정해진 질문을 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다. 공익에 부합하고, 시민이 원한다면 어떤 자리에서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청와대 기자단이 당시 ‘기레기’라며 비판받았던 이유 역시, 언론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질문만 했기 때문이다. 권력과 유착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불필요한 예의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그래서는 안 되고, 정치인은 언론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디서 고소한 냄새 안 나요? 경기도청 쪽인가?

이재명 당선인은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여기는 것을 대할 때, 거리낌이 없었다. 지난 17년 1월, 자신에 대한 허위보도를 한 TV조선에 대해 형사고소하는 한편, “폐간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뿐만 아니다. 자신에 대해 일베 관련 의혹을 제기한 네티즌 4명을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에서 고소한 바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재명은 성남시장으로 재직 당시 LH 공사와의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일어났던 시위의 참가자 70명을 공무집행방해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재명은 지난 대선 경선 과정 이전부터 ‘고소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SBS

언급한 부분이 전부는 아니지만, 기사의 여백이 너무 좁아서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당선인이 변호사 출신이라 법을 잘 알고 계신다는 점은 잘 알겠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이가 시민을 향해 법을 휘두를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의사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90여 개 나라의 인권 실태를 분석한 2017년 연례 보고서에서, 현행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자. 세계적으로 명예훼손죄는, 권력의 반대편에 선 이들을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2017년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한국 언론 자유지수를 보자. 63위다. 시민들이 나서 주권을 쟁취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어울리지 않는 순위다. 낮은 점수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명예훼손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론인이 스스로를 자기검열 해왔다는 것이다.

2018년 발표된 순위에서 한국은 43위로 무려 20계단을 뛰어 올랐다. 문재인 정부의 언론이 이전보다 더욱 자유를 얻게 된 것은 분명하다. ⓒ더팩트

이재명 시장은 이전에도 여러 번, 여러 법을 자신의 반대편에 선 이들의 표현을 억압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해 왔다. 이는 민주주의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가 의사를 결정한다’는 데에 있지 않다. 여러 의견과 주장이 자유롭게 발화되고, 그 과정에서 의사를 결정할 다수를 설득시키는 데에 있다.

“비판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용할 것인가.”

그가 진정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그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먼저 기울였어야 한다. 자, MBC가 이재명 당선인에게 던지려는 질문이 원래 뭐였는지 떠올려보자.

ⓒ박성제 MBC 기자 페이스북

“선거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는데 앞으로 경기도지사가 된 후 비판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용할 것인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비판하는 이를 처벌하는 대신 설득하고 대화하는 것. 그러나 그는 이 질문을 끝까지 듣지조차 않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경기도를 한반도 평화번영 시대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지역 화폐와 무상복지 사업을 연계해 복지 체감도를 높이겠다고 했다. 청년 배당, 산후조리를 지역 화폐로 주어 전통시장과 골목 상권에서 쓰이도록 하겠다고 했다.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했다. 나도 경기도민으로서, 그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디 민주주의의 정신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진이 일어난 이토록 다양한 이유들

아, 지진. 그것은 지구가 준 선물

2017년 11월 15일 오후, 지진이 일어났다. 기상청 관측 이래 두 번째 규모. 부상자 82명과 이재민 1,797명을 남긴 기록적인 재해였다. 물론 이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주민들은 커다란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리고

SBS가 교육부의 수능 연기를 발표하고 있다는 것을 한겨레가 보도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여기에…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수능이 미뤄졌다. 2006년 APEC, 2010년 G20 이래로 세 번째 연기. 그러나 수능 전날에 연기가 결정된 것은 초유의 일이다. 대학 입시를 목숨만큼이나 중요히 여기는 나라에서, 또 대학 입시 실패가 죽음으로 연결되기도 하는 나라에서, 이는 꽤 큰 혼란을 불러올만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어떤 이들에게 이는 선물이기도 했다. 몇몇 사교육 업체는 이를 ‘하늘이 준 선물’이라 불렀고, 성급히 ‘지진 특강’을 열었다. 학생들에게는 완벽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지구가 준 기회라 홍보했다. 물론, 지구가 또는 하늘이 공부가 부족했던 학생들을 위해 지진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진이 왜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를 그보다도 더욱 전근대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 말이다.

ⓒ뉴스1

하나. 자유한국당 류여해 최고위원은 17일 열린 당 최고위원회에서 이번 지진에 대해 “문 정부에 대해 하늘이 준 준엄한 경고, 그리고 천심이라고 하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고 발언했다. ‘천심’이라니. 그에 따르면 아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제사장이 틀림 없다. 신이시여, 지진을 멈춰주소서. 비를 내려주소서. 아, 이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통령은 역시 최순실이었다는 말인가.

 

ⓒ목포주안교회 유튜브

둘. 뉴스엔조이의 보도에 따르면, 영암삼호교회 이형만 목사는 이번 지진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종교계에 과세 문다 하니까 포항에서 지진이 났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다 세금을 내라 하나. 하나님께서 가만 있지 않는다. 하나님을 건드릴 때, 국가에 위기가 바로 다가오는 거다. 그걸 체감해야 한다.” 얼쑤. 자신에게 세금 내라 했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 된다. 하나님이 한국에 목사로 현신해 있으신 줄은 제가 미처 몰라뵙고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이고.

셋. 포항 한동대학교는 이번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이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 놀랍게도 한동대 관련 SNS와 단톡방은 성소수자 혐오로 들끓었다. 주된 내용은 이렇다. 지진이 발생한 이유는, 한동대 인권법학회에서 주최할 예정이던 임보라 목사 초빙 강연이라는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해온 목사를 학교에 데려오려 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 세상에, 그쪽 아버지 참 바쁘시네.

 

이토록 흔한 반지성주의

그들에게 지진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논리적 이유’는 이토록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할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투사가 우선시될 뿐. 논리와 이성을 버리고, 직관과 경험, 감정을 우선시하는 것, 우리는 이를 바로 반지성주의라 칭한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지식과 지성, 앎과 논리보다 분노와 적대, 감정이 중요시되는 사회, 이런 토양에서는 이를 이용하는 파시즘과 전체주의만이 싹틀 뿐이다. 나치가 그랬고, 매카시즘이 그러했듯이.

위의 사례들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지성주의는 더욱 더 비근하게, 또 숱하게 사람들 곁에서 움직이고 있다. 때로는 지성의 탈을 쓰고서, 내 편에 가까운 지식만, 나를 해하지 않는 지성만이 지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던 어용 지식인, 어용 시민이라는 말도 크게는 반지성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안 된다.

지성과 지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반지성과 반지성이 대결하는 구도 아래서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갈등과 적대, 불신과 냉소 뿐이다. 공부하고, 또 연구하고 나와는 다른 생각을 지닌 이를 ‘천벌 받을 사람’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거기서 모든 대화와 이해가 시작된다.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뷰티 인사이드]

현실이 만든 어떤 이별

자고 일어나면 몸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우진. 그처럼 기묘한 몸을 가지게 된 건 청소년 때부터였다. 어느 순간 그랬다. 남자였다가 여자였다가, 노인이었다가 아이었다가, 백인이었다가 흑인이 된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별 수도 없다. 그런 몸에 적응할 수밖에. 덕분에 그의 집에는 수십, 어쩌면 수백의 옷과, 안경과, 렌즈와, 신발이 있다.

그는 가구를 만든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가구. 아마도 모든 ‘한 사람’이 되곤 하는 그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런 그가 한 사람에게 반한다. 이수라는 이름의 여자. 가구점에서 가구를 안내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느낀다. 그녀의 관점과 생각, 시선이 그를 끌어당긴다.

우진은 이수에게 스스로를 고백하고, 이수는 어렵게, 어렵게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수는 하루에 한 번 남자를 바꾸는 여자가 되고, 이수 주변에는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수 역시 우진을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녀는 매일 달라지는 우진의 모습을 알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의 긴 고통 끝에, 우진은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힘들고 아픈 이별.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 상처 입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상황은, 현실은 그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넌 날 이해 못해, 넌 나를 몰라

현실이 만드는 이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비단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몸이 없어도, 이별은 쉽다. ‘헤어지는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되기도 하고, 학벌 차이가 되기도 한다. 성적 지향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별이 무려 전체의 82.9%라는 이야기는 현실감 없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헤어짐은 강남의 사거리처럼, 트웬티스 타임라인)

우진을 ‘사회적 소수자’에 대입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성소수자이며 장애인이고, 빈곤하고, 저학력자이며,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산다. 그에게는 시간조차 없다. 덕분에 그와의 연애는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 인식과 관점의 차이와 부족한 시간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확실히 쉬운 연애는 아니다.

감정적 이별에는 책임이 있다. 누군가가 마음이 식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친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 때로는 한쪽이 잘못하고, 가끔은 서로 잘못한다. 이 경우 책임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 피타고라스가 요즘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황금비율이 아니라 이별의 책임비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경제적·사회적 이별에는 명백한 책임이 없다. 권태도, 싫증도 관계 외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별을 앞둔 커플에게 가장 힐난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도대체 왜 그래, 왜 날 이해 못 해줘,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그리고 이별.

 

그럼에도 아주 명확한 한가지

흔한 패턴이다. 잘 짚이지 않는 현실보다는 눈 앞의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훨씬 편하며 때로는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연애는 무척 사적이며, 개인적인 일처럼 여겨지니까. 표출할 곳을 찾을 데 없는 분노는 용암처럼 바로 앞을 향해 흘러나간다. 어쩌면 마음을 계속 참아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책망은 반성을 부르거나, 억울함을 만든다. 이런 이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지 않는다. 자신의 탓이 아닌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내면의 상처는 곪고 깊어지리라.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그 힐난은 꽤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 억울한 분노가 향할 방향은 또 어디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별 앞에서, 서로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현명한 일은 연애의 과정을 천천히 복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별은 어떤 갈등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갈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그 후 비로소 답은 명쾌해진다.

내가 탓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 곧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각기 애썼다는 것을. 다만 그를 극복하기에 우리 둘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특별히 못나서 가난해진 것은 아니다

7월의 어느 이른 아침, 제부도의 한 상가 신축 현장이었다. 두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이를 처음 발견한 것은 현장 관계자였다. 두 사람은 연고도, 출신도, 성별도 달랐다. 이들을 묶은 것은 현실과 가난에 대한 비관이었다.

이들은 자살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사흘 전, 소셜 네트워크에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이를 기도하기도 했다. 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이 남긴 유서에는 많은 말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로는 충분했다.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서 태어나길…”

 

가난이라는 비극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돈이 든다. 먹고, 마시고, 자고, 씻고, 쉬는 데에 필요하다. 행여 아프기라도 하면 어떨까. 의료보험제도가 아무리 잘 되어 있다 해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은 상상 이상의 돈을 필요로 한다. 목숨을 유지하는데 그만한 돈이 드는데, 연명을 통해 벌 수 있는 돈이 터무니 없이 적다면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대개, 가난은 곧 죽음이다.

처지를 비관한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흔하다. 송파 세모녀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3년 밖에 흐르지 않았다.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 고통인 노년층의 자살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한 청소년이 남긴 쪽지의 내용이다. “스쿨 폴리스 아저씨는 연락이 없다. 우리가 가난해서 무시하는 것 같다.”

가난은 무시 당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유니셰프가 벌인 흥미로운 실험을 보자. 6살 소녀가 예쁜 드레스와 코트를 입었을 때는 모두가 관심과 호의를 비췄지만, 허름한 차림일 때는 무시와 무관심이 따를 뿐이었다. 소녀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가버리라고 말했는데 그게 너무 슬펐어요.”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대개의 가난한 사람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해서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경제상황에 맞춰,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저 조금씩 가난해져 왔을 뿐이다. 부모의, 그 부모의, 그 부모의 가난을 따라서.

과거에는 가난을 뒤집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교육이 그랬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높은 월급을 받으며 남 눈치 안 볼만큼은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좋은 학벌을 위한 경쟁만 유지될 뿐, 좋은 학벌이 보장하는 미래 따위는 사라졌다.

‘학벌없는사회’가 해산하며 남긴 글을 보자.

“재생산이 불가능한 삶은 같은 학벌이라는 심리적 연결도 끊어내 버리고 모두를 파편화하고 있다. (중략) 지금은 학벌이 권력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끔은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다.”

그래, 이제 한 번 가난은 영원한 가난이 된 시대다. 조금이라도 덜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공인인증서와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가난을 경쟁하고, 증명해야 하는 시대다.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법

중산층이 붕괴되고, 사회 다수가 가난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지만 가난은 끝내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유는 대부분 단순하다. 가난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이라는 고통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은 쉽다. 가난한 이들과는 다른 나를 설정한다. 또 그렇기에 ‘나’는 절대 가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빈곤한 이들에게 붙는 꼬리표는 이렇다; 부도덕하고, 게으르며, 노력할 줄 모르고, 더럽고, 품격 없다.

양상은 다양하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임대세대와 비임대세대를 나누어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 가는 길마저도 차별시키고, 비임대세대의 부모가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아이와는 놀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병신 같다, 좆같다는 말이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순간, 청소년들은 더 이상 이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럴 때 이런 말을 아무런 문제 없이 대체하는 말이 바로 ‘거지 같다’는 말이다. 전 대통령님께서도 사랑하셨던 드라마 OST를 떠올려보자. “이 바보 같은 사랑, 이 거지 같은 사랑 계속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

ⓒ SBS <시크릿 가든>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여성이라면 김치녀가 되고 된장녀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라면 돈을 노리고 접근한 꽃뱀이 된다. 계급상승을 이뤄낸 이라면 ‘개천 냄새 난다’는 모욕을 듣는다. 남성이라면 ‘가난하고 못 배웠을수록 씹치남’ 같은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바로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곁에

가난은 혐오하고 불쾌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88올림픽 직전, 도시미관 및 환경정비를 빌미로 집을 잃었던 이들이, 지난 2010년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서울역에서 쫓겨나야 했던 홈리스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월가 점령 시위, 월 스트리트 ⓒHuffPost

사회 다수가 가난에 가까워지고 있다. 1%가 부의 99%를 독점하고, 99%가 남은 부의 1%를 공유한다는 말은 구호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중산층의 붕괴는 심화됐다. 소득은 양극화됐다. 가난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가난을 혐오하는 이들은 상위 1%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래에서 가난과 맞닿아 있는 이들이다.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이는 당신이며, 또 나이다. 가난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그들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해서 벌을 받아 가난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당신이 특별히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 상으로 가난을 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심연 네트워크,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까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니체의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서 이 말은 이렇게 변주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다면, 페이스북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뭐, 페이스북의 자리는 트위터가 대신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이 차지할 수도 있다.

각각의 서비스는 각각의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심연은 이용자들의 이용패턴(좋아요, 체류시간 등)을 바탕으로 그가 과연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컨텐츠에 반응할지 계산하고, 그럴만한 컨텐츠를 그의 뉴스피드에 띄워 내고야 만다. 대부분 적중한다. 빅데이터는 이제 여러분의 바로 옆에 있다.

좋아요는 곧 돈이 된다.

결국 그는 심연을 더욱 오랫동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만 담은 머스트 해브 심연. 그럴수록 심연은 그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테다. 어쩌면 그는 심연 속에서 동경하게 된 위대한 페북스타가 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관심에 만취한 채 배꼽에 소주를 담아 마실 수도 있다.

페이스북 안에서 ‘좋아요’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보이게 된다.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좋아요만 많이 받는다면 스폰서가 붙을 수도 있고, 광고를 받을 수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스타’다. 페이스북을 통한 유명세는 때로 TV를 압도한다.

괴물과 싸우고 있습니까

뭐, 페이스북에 골몰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을지 고민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실, 이 경구의 앞에는 더 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붙는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역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라는.

이 말 역시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바꿔볼 만하다. “누구든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은, 그 역시 조리돌림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이 모두가 정의의 사자다. 정의의 사자들은 쉽게 흥분한다. 막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정의의 사자들이 나서 이들을 재단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사람은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쉽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조리돌림을 위한 완벽한 매체다. 폐쇄성과 공개성과 전파력이 완벽히 상호보완된다. 뉴스피드에는 욕을 할 만한 사람이 캡쳐/공유/리트윗으로 계속해서 등장하고, 늘어나는 좋아요 숫자는 당신의 참여를 독려한다.

온갖 이유로 조리돌림이 이어진다.

덕분에 하루에 최소 한 명 이상은 광범위하고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다.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글 하나가 수백, 수천 명으로부터, 혹은 그 이상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었던 비난을 받게 한다.

그가 정말 비난 받을만한 일을 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망각되거나 무시된다. 물론 정말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다수의 사람이 한 명의 개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개인이 있었다

영화 <소셜포비아> 포스터

그 순간 개인은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셜포비아(2015)>가 좋은 예다. 트위터를 통한 조리돌림, 현피를 생중계한다던 아프리카 BJ와 압박을 받던 한 사람의 자살. 그리고 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한 네티즌의 자살 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당장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 또 어제 일어났다고 해도 아, 그래, 안타깝네-하고 넘길 만큼 있음직한 일이다.

당신이 정의를 위해 남긴 글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크의 모든 비난은 사형私刑이며, 즉결처형이다. 이 모순 앞에서 항상 망설여야 한다. 글을 쓰기 전 수십 번은 되물어야 한다. 맥락을 살피고, 말을 다듬어야 한다. 매번 팔짱을 낀 채 중립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신의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Christopher Nolan

한 면의 정의가 다른 쪽에서 보기에도 정의라는 법은 없다. 정의에는 쾌감이 없다. 정의는 늘 불쾌하고 불편한 축에 속한다. 당신이 내뱉는 말들이 즐겁고, 그로 인한 반응이 즐겁다면 당신은 아마 정의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자, 저 심연 속에서 분투하는 괴물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 그 역시 스스로를 정의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심지어 그 비난을 받게 될 사람이, 언젠가는 괴물이 된 당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