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에게 버텨낼 문장을 주었듯이

허지웅 작가가 지난 12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투병 사실을 알려왔다.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액암의 종류라고 합니다. 붓기와 무기력증이 생긴지 좀 되었는데 미처 큰 병의 징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함께 버티어 나가자’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삶이란 버티어 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녀사냥]에 출연했던 얼마간 이후부터, 브라운관에 비친 그의 얼굴은 퉁퉁 불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성형 의혹’을 받으며 필러와 보톡스 탓이라는 악플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미운 우리 새끼]에서 무기력증을 호소하며 비뇨기과를 찾기도 했다. 병원은 그에게 ‘남성 갱년기’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꽤 큰 팬이었다. 그의 애티튜드가 어떻건 그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생각이 어떻건, 그의 글은 읽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 읽었던 그의 글은 대학내일에 연재되던 [개포동 김갑수 씨의 사정]이라는 소설이었다. 유쾌하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의 문장은 정갈했고, 표현은 새로웠다. 어느 순간 대학내일에 그의 글이 연재되지 않았고,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그것이 어떤 기독교 단체의 항의 때문임을 접했다.

황당했고 아쉬웠다. 아쉬웠던 만큼 그의 블로그를 열심히 들락거렸던 것 같다. 얼마 후 그를 JTBC [썰전]과 [마녀사냥]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러 신문과 잡지, 또 책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읽는 맛이 있는 글, 울림을 줄 수 있는 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글, 그런 글.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글을 쓰는 삶이 쉬울 리가 없다고, 글로 벌어 먹고 살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내게 여전히 즐거운 일이었다. 허지웅 작가가 블로그에 쓴 글, ‘버티라’는 말은 그런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작가로 살아남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작가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끝까지 버티어 내다보면 살아남아 마침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갖게 될 것이라고.

글쓰기와 관련된 대외활동을 시작했고, 대외활동으로 알게 된 인연이 (인턴과 마찬가지인 일이었지만) 직업으로 이어졌다. 허지웅 작가가 한때 일했던 곳이었다. 함께 기자 생활을 했다던 상사도 있었다. 일은 고됐다. 정시퇴근은 먼 일이었다. 매일 컨펌과 수정 사이에서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한숨이 늘었고, 군살도 늘었다. 늦은 시간 퇴근하고 먹을 건 야식뿐이었다.

그만둘까 싶었다. 그만두고 싶었다. 월 30의 월세와 5만원 남짓의 공과금, 생활비를 감당할 자신은 없었지만, 매일 악몽을 꾸는 삶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생일이었다. 컨펌이 나질 않았다. 아홉 시, 열 시, 열한 시, 열두 시. 생일이 끝났다. 열두 시 반쯤이 되어서야 겨우 직장 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밖에서는 애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와락 안았다. 카페에 가 선물을 열어 보았다. 마음이 먹먹해졌다. 허지웅 작가의 [버티는 삶에 관하여]가 놓여 있었다. 편지지를 사지 못해 던킨도너츠 영수증지에 쓴 절절한 편지 한 통과 함께. 5개월 남짓 남았던 계약기간을 그 책과 편지를 보며 버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이를 악물었다.

삶이 힘들어지는 날에는 그 책을 손에 들었다. 같이 버티어 내자는 그 부분을 몇 번을 반복해 읽었다. 그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태껏 잘 버텨왔다. 얼마나 더 버티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허지웅 작가의 투병 소식을 들었을 때 맘이 아렸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가 20대 초반 이후의 내 삶에 있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온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책 한 구절을 다시 중얼거렸다.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우리의 지상 과제는 성공이나 이기는 것이 아닌 끝까지 버텨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버티고 버텨서 다음 세대에게 후하고 창피하지 않은 우리가 됩시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 남 보기에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창피한 사람이 되지 맙시다.”

그가 걸린 병이 얼마나 큰 병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항암, 어려운 일이고, 아픈 일이다. 암으로 스러져 간 이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암도 암이지만, 항암의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나는 그에게 병마와 싸워 이겨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그가 할 수 있는만큼 끝까지 버티어 내기를 기원한다. 그가 나에게 지켜내고 버텨낼 문장을 주었듯, 나는 그에게 먼발치서 응원을 보낸다.

괜스레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괜스레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접점도 없고, 겹치는 취향도 없다. 나이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다. 취미도, 직업도 다르다. 하다 못해 같이 좋아하는 음식 따위도 없다. 생각도, 지향도, 살아 온 인생도 살아갈 인생도 다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라도 더 건네고 싶고, 조그만한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이가 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니가 무슨 상관이라고. 많은 경우, 주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괜히 내가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비웃었을 게 분명하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런 호의는 폭력이 되기 쉽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런 공통점 하나 없이 누군가에게 이런 종류의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한 일은 아니다. 연애감정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그에게서 봤던 것은 어떤 상처였는지도 모른다. 깊은 우울감, 외로움과 어딘가에서 받았던 상처.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고, 내가 받았던 것이었으며, 그리고 내가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고민은 내가 겪었던 고민이었고, 그가 아파하고 있는 건 내가 아팠던 상처였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 덜 아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묻고 싶었다. 그의 자존감을 어떻게든 붙들어 주고 싶었다. 당신은 이만큼 가치 있고 멋진 사람이라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충분히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좌절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그 말들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을지는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조금은, 조금은 멀찌감치서 그(들)를 응원하기로 했다. 무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다만 그가 도움을 청할 때 언제든지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나는 이쯤 서서 당신을 응원할 터이니, 그 행복을 간절히 빌 터이니.

관계가 만들어지는 방법, [500일의 썸머]

Take me out tonight. Where there’s music and there’s people who are young and alive.

Driving in your car I never never want to go home because I haven’t got one anymore.

This is a story, a boy meets a girl

출근길 엘레베이터 안에서 여자를 마주쳤을 때, 남자의 헤드셋에서는 더 스미스(the Smith)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부터 여자에게 반해 있었고, 여자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 음악에 반응했다. 드디어,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머지 않아 회식 자리에서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고, 둘은 친구가 된다. 정확히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믿었지만,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그녀를, 옥토퍼스 가든을 좋아하는 그녀를,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그의 사랑을, 그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그를,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을 중시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But, this is not a love story

영화 [500일의 썸머] 속 썸머는 한때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일방적인 어장관리녀라 비판했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싫다.”는 말을 그저 (비)웃어 넘길 뿐이었다. <건축학개론> 속 수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썸머가 일방적이었던가. 그녀는 톰에게 몇 번을 반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톰은 여기에 대해 ‘동의하는 척’ 했다. 괜찮냐고 묻는 썸머에게 톰은 다시 수차례 괜찮다고 답했다. 톰과 썸머의 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은, ‘친구로도 괜찮다’는 대답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썸머는 톰에게 일종의 ‘이용 전 약관’을 건넨 셈이다. 주의사항과 이용 전 약관을 꼼꼼히 읽지 않고 동의 버튼을 누른 댓가는 처참하다. 대충 읽고 동의했다면, 그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톰은 오로지 썸머만 탓할 뿐이었다.

 

당신 곁에 머물다간 관계에 대하여

관계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한다. 그것은 연인 간의 관계일 수도, 혹은 친구 간의 관계일 수도, 가족 관계일 수도, 또는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 역시 흔히 목격한다. 다만 아쉽게도 그것이 썸머만의 탓일 수는 없다.

관계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낼 수 있는 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기에, 두 사람이 관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기에 관계에 대한 책임은 결코 누군가 한 명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연애, 우정, 가족… 모든 관계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녀)가 원하는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납치된 어린 아이라는 환상과 무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계는 두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화의 끝 무렵, 톰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해낸다. 여름(summer)이 가고, 가을(autumn)이 그에게 찾아온다. 여름은 아픔과 성장통의 시기이며, 가을은 수확과 추수의 시기이다. 지난 여름 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 톰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알 법이 없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다. 톰이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혼자서 정의하고, 혼자서 사랑하고, 혼자서 망쳐버리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 썸머와의 관계들을 통해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탓하고만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난의 맛

대개 궁하다. 궁상 맞게 또 컵라면 이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다. 학식 먹기 싫다고 요 앞에 식당에 가자는 친구 말에 돈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게 부끄럽지만 별 수 없다. 벌고 또 벌지만 모을 새도 없이 잔액부족.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지금이야 좀 낫다. 적어도 월세나 생활비는 나가지 않는다. 집에만 붙어 있는다면 굶을 일은 없다. 공과금이 미납되었다고 전기가 끊길 수 있다는 독촉장은 날아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알바비가 들어왔다. 이중 대부분은 지난달 교통비, 얼마는 큰맘 먹고 할부로 샀던 가구, 또 얼마는 빌렸던 돈을 갚는 데 쓰일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또 당분간은 빈털터리다. 어머니가 물었다. “혹시 월급 들어올 때 안 됐니.” 어떻게 또 귀신같이 아셨다. 치킨이라도 사란다. 알겠다고 했다. 옷을 챙겨 입고 동네 치킨 집으로 향했다.

테이크 아웃은 천 원 할인인 곳이다. 배달보다 직접 사가는 게 싸다. 네 가족 다 먹을 걸 생각하면 웬만한 크기는 안 된다. “저기 2번 세트랑요, 혹시 콜라 큰 걸로 바꾸면 얼마인가요?” 20분 정도를 멍하니 앉아 조리와 포장을 기다렸다. <썰전>을 잠시 보다가 <백종원의 푸드트럭>으로 눈을 돌렸다. 백종원이 맛이 없는 푸드트럭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을 때쯤

“포장 다 됐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차, 서비스직에서 일하다 보면 이게 문제다. 감사합니다의 뒤에는 어김없이 안녕히 가라는 말이 붙는다. 가긴 어딜 가, 내가 가야지. 포장된 치킨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러다 기껏 산 치킨 다 젖겠네. 우산은 들고 나오지 않았지만 굳이 뛰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2만원? 그렇게 비싸니? 치킨 값이 오르긴 올랐네.” “그래도 맛은 있네.” 뭐 그런 실없는 대화가 오가고, 나는 헤헤 하고 웃는다. 그래도 넷이 먹기는 좀 부족한 양이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먹는 게 중요하다.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잠시 두드렸다. 딱히 쓸 이야기가 생각 나지는 않는다.

두 시간, 세 시간쯤 지났을까.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식탁에는 아까 큰 사이즈로 바꿔 산 콜라가 사 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펩시콜라. 김이 빠진 채 미지근한 단 맛이 목구멍으로 쏟아진다. 그 맛, 그 맛. 익숙한 맛이다.

불현듯 생각나는 어떤 장면. 오후 두 시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반지하방, 큼큼한 냄새, 주말인데도 밀린 일을 하느라 새벽에나 잠들었던 어느 날. 쌀이 다 떨어져 시켰던, 냉장고에 넣어둬 눅눅해진 피자 한 조각과 함께 마셨던 콜라와 똑같은 그 맛.

그 맛은, 가난의 맛이다. 돈이 너무 없었던 날, 월급을 받았지만 몇 달 밀린 월세와 공과금, 카드값으로 다 나가버린 그날, 쓸 수 있는 돈이 5만원 정도 남아서 탕진이라도 해버리자 싶어서 시켰던 치킨에 딸려왔던 콜라가 생각나는 맛.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서 편의점 기프티콘으로 샀던 도시락에 딸려 있던 콜라 한 캔이 생각나는 맛, 출근을 했다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법인카드로 사는 밥을 먹을 수 없었던 날, 반쯤 남은 생라면을 부숴 먹으며 마셨던, 생수통에 담겨 있던 김 빠진 사이다가 생각나는 맛.

그 맛은 가난의 맛이다. 나는 김 빠진 펩시콜라에서 가난을 느낀다. 곰팡이의 냄새를 느낀다. 햇빛이 비추지 않았던 그 방, 환풍이 되지 않았던 반지하방을 느낀다. 수도세를 독촉하던 문자를 느낀다. 후불교통카드가 정지됐다는 문자를 느낀다. 그 맛은 여실히 슬프다.

그 호의, 잠시 넣어두세요

가끔 편의점 알바를 한다. 오늘은 내일로를 간 친구 대타였다. 그리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는 돈이 궁했고 그 녀석은 시간이 궁했다. 부럽다. 나는 아직 못 가봤는데. 그런 말을 “알겠다 잘 다녀와”라는 문자 뒤로 숨겨 놓았다.

뭐, 별다를 것 없었다. 열 시쯤이 되어서는 막 나간 상품들을 채워 넣었다. 과자류, 컵라면, 삼각김밥이 팔리고 난 자리를 다른 물건으로 매꿨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매장 안과 밖을 빗자루로 쓸고, 대걸레로 닦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볼 때마다 한국인의 양심과 시민의식을 의심케 하는, 편의점 벤치 위에 잔뜩 쌓인 쓰레기들도 분리수거했다. 일반쓰레기와 재활용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가 동시에 나온다. 담배꽁초가 바닥에 가득했다. 날은 쨍쨍 쪘다. 더워서 몸이 녹을 것 같았다.

이런 날엔 적당한 음료와 아이스컵이 필수다. 7월 한 달 간 반값 할인을 하는 음료와 500원짜리 아이스컵을 사 부었다. 여기는 직원 할인도 없나. 직원이 물건을 사 매출을 채우다니, 정말 이상한 구조다.

키야, 시원하다~!

점심 시간이다. 물류가 들어온다. 아이스컵 두 박스, 아이스크림 세 박스, 김밥과 샌드위치. 우선 아이스컵이 녹기 전에 이것 먼저 정리해야 한다.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라. 아이스컵 냉장고가 문제다. 누가 유리 문 손잡이를 망가뜨렸다. 아이, 이거 잘 안 들어가네. 다시 한 번, 그때.

“아이, 왜 이걸 못하고 있어. 내가 해줄게.” 거구의 남자 손님이었다. 나이는 40대 후반 정도 돼보였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니, 손님 괜찮습니다. 이건 제가 할..” “아니야, 됐어. 내가 잘 알아. 이거는 아예 문을 빼서 하면 돼. 자 들어봐.” 그는 유리 문을 냅다 뜯어 버렸다. “아뇨, 손님 괜찮으니 제가 하겠…”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쨍그랑-하고 깨졌다. 냉장고 문이 깨졌다.

패닉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됐다. 아, 주님. 제발, 이러지 좀 맙시다. 그는 다짜고짜 내게 성질을 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끼우는 법도 사장이 안 가르쳐줬어요? 좀 배웠어야지. “아뇨, 저기요 손님. 지난 번엔 그냥 제가 끼우는 방법으로 잘 끼웠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고, 이윽고 다시 화를 냈다.

“아니 아이스컵 얼른 옮겨야지 뭐해요. 여기 무슨 냉동실 없어요? 이런 거 보관하는 데?” “아뇨, 아이스크림 냉장고 말고는 없는데요.” “아니, 그게 왜 없어? 보관하는 데 있을 거 아니야.” “아뇨, 없습니다…” 말줄임표 뒤에 수백 마디의 말을 집어 넣었다가 다시 지웠다. 그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냈다면 나는 아웃사이더보다 말을 빨리 해내는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 분 참…

그러더니 30초 후 그는 다시 내게 성질을 냈다. “아니 답답하네 거참, 빨리 유리 안 치우고 뭐해요, 손님들 다 다치게 생겼잖아.” 아니, 그건 유리를 깬 사람이 할 말은 아니죠. 답답했다. 그래도 손님인데, 참자. 그래도, 좋은 의도로 그랬을 텐데,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오. 나는 마침내 부처가 되고 있었다. 오, 이것도 계획에 없었답니다, 주님.

그렇게 유리를 치우는데 여념이 없었을 때,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내가 미안하긴 한데. 나도 다른 편의점 점장이에요. 저거 유리 전화하면 금방 오니까 전화해요.” 그는 자신의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유리를 깬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는 것처럼 무심한 듯 시크하게 가게를 나가버렸다. “저기요, 번호 주셔야죠.”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매대 뒤에는 벌써 손님이 한 가득이었다.

이거, 지웅 씨가 내주셔야겠는데요?

그 결과, 나는 5만원에 달하는 아이스컵 냉장고의 문 값을 물게 됐다. 그날 하루치 일당보다 조금 더 많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도움을 베풀던 그는 결국 폐만 끼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것은 매우, 불필요한, 호의였고, 매우, 의미없는, 친절이었다. 그는 무척 좋은 의도로 나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점장’이기 때문에 ‘알바’인 나를 가르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결과는? 이렇다. 호의는 때로 이토록 지독한 폭력이 된다. 특히 그것이 상대가 원하지 않았을 때라면 더욱 그렇다.

“너 살 좀 빼야겠다, 건강에 안 좋아.” 유리문이 하나 깨졌다. “취업은 했니?” 유리문이 또 하나 깨졌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너무 늦게 하면 안 좋아.” 와장창. “군대는 일찍 다녀와야 해.” 쨍그랑. “여자가 그러면 못 써.” 벌써 몇 장을 깬 거야.

우리는 이따금 호의를 가장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상대를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숙한 존재”로 가정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런 친절은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의 도움 없이도 그는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다. 당신의 도움이 정말 필요했다면, 또 당신이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라면 진작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유리를 깨고 싶지 않다면, 그 호의는 고이 접어 두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