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네트워크,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까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니체의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서 이 말은 이렇게 변주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다면, 페이스북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뭐, 페이스북의 자리는 트위터가 대신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이 차지할 수도 있다.

각각의 서비스는 각각의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심연은 이용자들의 이용패턴(좋아요, 체류시간 등)을 바탕으로 그가 과연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컨텐츠에 반응할지 계산하고, 그럴만한 컨텐츠를 그의 뉴스피드에 띄워 내고야 만다. 대부분 적중한다. 빅데이터는 이제 여러분의 바로 옆에 있다.

좋아요는 곧 돈이 된다.

결국 그는 심연을 더욱 오랫동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만 담은 머스트 해브 심연. 그럴수록 심연은 그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테다. 어쩌면 그는 심연 속에서 동경하게 된 위대한 페북스타가 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관심에 만취한 채 배꼽에 소주를 담아 마실 수도 있다.

페이스북 안에서 ‘좋아요’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보이게 된다.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좋아요만 많이 받는다면 스폰서가 붙을 수도 있고, 광고를 받을 수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스타’다. 페이스북을 통한 유명세는 때로 TV를 압도한다.

괴물과 싸우고 있습니까

뭐, 페이스북에 골몰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을지 고민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실, 이 경구의 앞에는 더 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붙는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역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라는.

이 말 역시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바꿔볼 만하다. “누구든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은, 그 역시 조리돌림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이 모두가 정의의 사자다. 정의의 사자들은 쉽게 흥분한다. 막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정의의 사자들이 나서 이들을 재단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사람은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쉽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조리돌림을 위한 완벽한 매체다. 폐쇄성과 공개성과 전파력이 완벽히 상호보완된다. 뉴스피드에는 욕을 할 만한 사람이 캡쳐/공유/리트윗으로 계속해서 등장하고, 늘어나는 좋아요 숫자는 당신의 참여를 독려한다.

온갖 이유로 조리돌림이 이어진다.

덕분에 하루에 최소 한 명 이상은 광범위하고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다.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글 하나가 수백, 수천 명으로부터, 혹은 그 이상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었던 비난을 받게 한다.

그가 정말 비난 받을만한 일을 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망각되거나 무시된다. 물론 정말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다수의 사람이 한 명의 개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개인이 있었다

영화 <소셜포비아> 포스터

그 순간 개인은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셜포비아(2015)>가 좋은 예다. 트위터를 통한 조리돌림, 현피를 생중계한다던 아프리카 BJ와 압박을 받던 한 사람의 자살. 그리고 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한 네티즌의 자살 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당장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 또 어제 일어났다고 해도 아, 그래, 안타깝네-하고 넘길 만큼 있음직한 일이다.

당신이 정의를 위해 남긴 글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크의 모든 비난은 사형私刑이며, 즉결처형이다. 이 모순 앞에서 항상 망설여야 한다. 글을 쓰기 전 수십 번은 되물어야 한다. 맥락을 살피고, 말을 다듬어야 한다. 매번 팔짱을 낀 채 중립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신의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Christopher Nolan

한 면의 정의가 다른 쪽에서 보기에도 정의라는 법은 없다. 정의에는 쾌감이 없다. 정의는 늘 불쾌하고 불편한 축에 속한다. 당신이 내뱉는 말들이 즐겁고, 그로 인한 반응이 즐겁다면 당신은 아마 정의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자, 저 심연 속에서 분투하는 괴물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 그 역시 스스로를 정의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심지어 그 비난을 받게 될 사람이, 언젠가는 괴물이 된 당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