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것들에게서 나는 냄새

해당 게시물에는 영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감상하시지 않은 분들 중 영화 내용 및 결론에 대한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말이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이 자연스레 몸으로 느끼는 혐오감을 고백한다. 그는 이어 이렇게 진술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가난한 이에게는 냄새가 난다. 아니, 악취가 난다. 향수나 디퓨저, 캔들로도 쉽게 가릴 수 없다. 뼛속 깊이 새겨지고, 장기에 깊게 배인 냄새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는 이런 냄새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이 아래에서 부리는 이들이 필요 이상으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싫어하는 박 사장(이선균)은 그의 기사 기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다른 건 선을 넘을 듯 안 넘을 듯 결국 안 넘어서 좋은데, 냄새가 선을 넘어.”

그는 기택의 냄새를 이런 단어를 들어 설명한다. 노인 냄새,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행주 삶는 냄새,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그는 박 사장과 연교가 냄새를 언급할 때마다 스스로의 옷에서 냄새를 맡으려 애쓴다. 그는 스스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반지하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환경에 이미 깊게 밴 냄새이기 때문이다.

 

반지하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분명 박 사장의 집에서도, 그의 가족들에게서도 어떤 냄새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냄새는 선을 넘지 않는다. 부유한 자의 냄새는 달콤하고, 향기롭고, 은은하다. 하층 계급의 냄새는 악취가 되지만 상층 계급의 냄새는 향이 된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집은 비릿한 곰팡이 냄새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거실의 통유리로 햇살이 쏟아지는 박 사장의 집과 반지하인 기택의 집을 비교하며 이것이 “빈부격차의 정점”이라고 말한다.

 

다송이 기택네 식구더러 ‘같은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했던 일을 두고 그들은 고민을 시작한다. 섬유유연제를 바꾸어야 하나, 다 다른 걸 써야 하나 하고. 그러나 기정은 그 냄새가 “반지하 냄새”라며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 냄새가 가시지 않을 것이라 설파한다. 실로 그렇다. 10평 남짓한 반지하방에서 자취하던 시절, 온 집안의 벽지에는 곰팡이가 눌러 붙었다. 벽지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내 몸에도, 식기와 가구에도, 옷에도 그 꿉꿉한 냄새가 들러 붙었다. 꽤 비싼 디퓨저를 두어봤지만, 그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아마 집을 바꾸더라도 그 냄새는 꽤 오랫동안 그들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들의 옷과 가구와 몸에 기생하면서. 그 냄새가 단지 반지하 방에서 풍기던 비릿함이었을리는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아프기 마련이다. 병원에 가기조차 꺼린다. 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두려워서, 검진에 드는 비용조차 아까워서.

 

냄새의 아비투스

입 냄새의 80%는 설태, 충치, 치석, 치주염과 같은 치과 질환으로 발생한다. 호흡장기나 소화장기에 질병 또한 마찬가지다. 장과 간장 사이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체내 영양 흡수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혈액으로 흡수되면 구취나 체취가 생겨난다. 간장 기능이 저하되면 냄새의 원인 물질이 혈류를 타고 온몸을 흘러 다닌다. 가난한 자는 냄새의 원인을 찾을 기회조차 없다.

 

씻는 습관조차 가난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물값이 아까워 매일 샤워하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몸을 씻을 온수란 것은 찬 물을 어떻게든 끓여서 겨우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니, 어떤 이들에게는 씻을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냄새를 씻어내지 못한 이들은 결국 ‘가난한 티’를 내게 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건 단지 ‘자본’이 아님을 설명하며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구별짓기) 이 문화자본은 인간의 몸에 깊게 베인 생활습관과 취향, 말투와 인지 능력을 통해 나타난다. 학력과 자격을 뜻하는 사회자본, 인맥을 의미하는 사회관계자본 또한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 짓는 단서다. 기태의 가족은 사회관계자본과 사회자본은 그럴 듯하게 속여냈지만, 이 냄새라는 아비투스는 쉽게 바꾸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계급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매커니즘이다. 졸부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하더라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무산 계급의 촌티를 쉽사리 벗어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생선용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할 줄도 모르며, 자기의 페라리 뒷유리창에 원숭이 인형을 매달아 둘 것이고, 전용제트기의 계기판에는 성 크리스토포로의 조각상을 올려 놓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계급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매커니즘이다. 가난한 이에게만 나는 이 냄새는, 아주 잔인한 것이다.

 

근근이 버텨볼 뿐이다

이야기의 종점에서, 기택은 박 사장 저택의 지하로 숨어들고 기우는 아버지를 구해내기 위하여 부자가 되어 그 집을 사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변변한 학벌도 없는 그가 학벌조차 실패하는 시대에 그만큼의 돈을 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수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단한 운이 따라야 할 것이다. 로또 한 번 당첨되는 정도로는 그 집을 살 수 없다. 아마 관객도, 감독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가난을 벗어나 부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들리는 이야기이다. 아마, 안 될 것이라고. 영화 속 대만 카스테라 집을 열었던 기택과 근세 역시 모두 비슷한 꿈을 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방공호를 향해 내려가는 계단처럼 끝까지 곤두박질칠 뿐.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대답은 원론적일 뿐, 현실적이지는 못하다. 대개 우리는 기택과 근세처럼 적대적일 뿐이다. 우리는 똑같이 대만 카스테라 집을 열 것이고, 함께 망할 것이며, 서로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골몰할 것이며 또 그 이후에도 똑같이 가난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은 채로 근근이 버텨볼 뿐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은 채로 근근이 버텨볼 뿐이다.

 

Beep, 너와 나 사이의 아주 적당한 경계선

Hi there 인사해 호들갑 없이

2008년 9월 미아라는 곡으로 데뷔한 뒤 무려 10년이다. 10년의 세월 간 아이유가 쌓아온 것은 결코 적지 않다.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조한 곡들,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이라는 고백으로 국민여동생의 자리를 굳혔으나, 그는 더 이상 여동생, 아이돌 가수로 남아 있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이제 누구도 아이유에게 이런 걸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Modern Times]의 수록곡 금요일에 만나요와 싱글 [마음]을 통해 자신의 프로듀싱 능력을 시험하더니, 이내 자신이 프로듀서를 맡은 미니앨범 [CHAT-SHIRE]를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아이유는 누구도 쉽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다. 가수 혹은 엔터테이너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그런 자신에 대한 시선들에 하나하나 반박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앨범을 통해서.

그는 아이돌로 시작했지만 아티스트로 거듭났다1).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뿐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아이유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싱글 [삐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번 곡을 통해 10주년을 함께해 온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는 대신, ‘아이유’를 향한 사람들이 시선에 대응한다. 삐삐(Beep Beep) 소리를 내면서.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매너는 여기까지

“쟤는 대체 왜 저런 옷을 좋아한담. 기분을 알 수 없는 저 표정은 뭐람. 태가 달라진 건 아마 스트레스 때문인가. 걱정이야 쟤도 참.” 가사에서 알 수 있듯 이 곡은 ‘스물셋’의 연장 선상 위에 있다. [CHAT-SHIRE]에서는 타이틀곡 ‘스물셋’을 통해 자신을 향한 대중들의 이중적 시선을 비웃으며 자신이 ‘여우인지 곰인지’ 맞춰보라고 이야기했던 그다. 무언가 날이 선 듯 보였던 아이유였지만 그는 지난 앨범 [Pallete] 이후 한층 여유로워졌다.

 

“스킨십은 사양할게요 back off back off 이대로도 좋아요 balance balance (…) Hello StuPID 이 선 넘으면 ” 그는 오지랖 넓은 이들을 애써 비웃기보다, 그들에게 한 걸음 물러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선을 넘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이들에게 분명한 경고음을 날린다. 하지만 이 곡이 연예인과 그를 둘러싼 대중들의 관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계선을 허물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뿐 아니라, 자신의 경계선을 먼저 거둬들이며 다가오는 이들 역시 거부한다. “I don’t care 당신의 비밀이 뭔지 저마다의 사정 역시 정중히 사양할게요 not my business”라고 노래하면서 말이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까만 속마음까지 보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전작 ‘안경’에서도 읽을 수 있는 정서다.

 

그 선 넘으면 정색이야 거리 유지해

그가 이런 가사를 써내기까지 어떤 심정이었을까.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들어야 했을 질책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관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관심에 비례하는 양의 무례를 마주한다. 때로는 그의 책임이 아닌 일조차도 그에게로 돌아간다. 관심을 보여달라고 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스타에게서 받은 관심을 훈장처럼 여기며, 관심을 받기 위해 기어코 이상해지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다. 트위치에 널린 저격 유저들을 보라.

크기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런 종류의 무례한 경계 허물기는 빈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쉽게 겪게 되는 일이다. 걱정해주는 척 건네는 오지랖들이 대개 그렇다. “이제 슬슬 결혼할 준비 해야지.” “취직준비는 잘하고 있니, 요새 어렵다는데 걱정이네.” “그렇게 살이 쪄서 어떡하니.” 따위의 말들. 그런 걱정이 허락된 관계가 아니라면 그건 공격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알아서 잘 할게요…

‘나와 너’라는 관계에서 허락된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또 이해 받길 원하는 사람들. 자신의 다름을 드러내 특별함을 전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제 통성명을 한 사이에 맥락 없이 자신의 고통과 기구함을 늘어놓는 사람들. 전자의 이들이나 후자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명확한 경계선뿐이다. 선을 긋는 것이 악역을 자처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We don’t know each other

이런 종류의 경계 허물기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딱 하나다. 무례함. 이는 지독히도 무례한 일이다. 관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감각에 근거해 타인의 삶에 함부로 난입해, 정해놓은 경계와 규칙을 실컷 깨어 놓기 때문이다.

무작정 가깝고 격 없는 것이 ‘좋은 관계’임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고, 그 거리는 그 관계의 깊이와 시간만큼 좁혀지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 상대방을 나의 선 안으로 초대하는 것 모두 그 상대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다.

무리해서 경계선을 넘지 말 것. 함부로 그 선을 넘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를 곤란하게 하지 말 것. 놀랍도록 당연한 이야기다. 놀랍도록 잘 지켜지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면, 그가 그은 경계도 면밀히 살필 것. 당신의 나라는 아직 EU에 가입하지는 않은 모양이니까.

 

1) 위 두 개를 등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돌인 아티스트도, 아티스트인 아이돌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돌로 출발한 이가 아티스트가 되어간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뷰티 인사이드]

현실이 만든 어떤 이별

자고 일어나면 몸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우진. 그처럼 기묘한 몸을 가지게 된 건 청소년 때부터였다. 어느 순간 그랬다. 남자였다가 여자였다가, 노인이었다가 아이었다가, 백인이었다가 흑인이 된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별 수도 없다. 그런 몸에 적응할 수밖에. 덕분에 그의 집에는 수십, 어쩌면 수백의 옷과, 안경과, 렌즈와, 신발이 있다.

그는 가구를 만든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가구. 아마도 모든 ‘한 사람’이 되곤 하는 그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런 그가 한 사람에게 반한다. 이수라는 이름의 여자. 가구점에서 가구를 안내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느낀다. 그녀의 관점과 생각, 시선이 그를 끌어당긴다.

우진은 이수에게 스스로를 고백하고, 이수는 어렵게, 어렵게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수는 하루에 한 번 남자를 바꾸는 여자가 되고, 이수 주변에는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수 역시 우진을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녀는 매일 달라지는 우진의 모습을 알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의 긴 고통 끝에, 우진은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힘들고 아픈 이별.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 상처 입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상황은, 현실은 그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넌 날 이해 못해, 넌 나를 몰라

현실이 만드는 이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비단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몸이 없어도, 이별은 쉽다. ‘헤어지는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되기도 하고, 학벌 차이가 되기도 한다. 성적 지향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별이 무려 전체의 82.9%라는 이야기는 현실감 없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헤어짐은 강남의 사거리처럼, 트웬티스 타임라인)

우진을 ‘사회적 소수자’에 대입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성소수자이며 장애인이고, 빈곤하고, 저학력자이며,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산다. 그에게는 시간조차 없다. 덕분에 그와의 연애는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 인식과 관점의 차이와 부족한 시간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확실히 쉬운 연애는 아니다.

감정적 이별에는 책임이 있다. 누군가가 마음이 식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친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 때로는 한쪽이 잘못하고, 가끔은 서로 잘못한다. 이 경우 책임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 피타고라스가 요즘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황금비율이 아니라 이별의 책임비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경제적·사회적 이별에는 명백한 책임이 없다. 권태도, 싫증도 관계 외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별을 앞둔 커플에게 가장 힐난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도대체 왜 그래, 왜 날 이해 못 해줘,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그리고 이별.

 

그럼에도 아주 명확한 한가지

흔한 패턴이다. 잘 짚이지 않는 현실보다는 눈 앞의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훨씬 편하며 때로는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연애는 무척 사적이며, 개인적인 일처럼 여겨지니까. 표출할 곳을 찾을 데 없는 분노는 용암처럼 바로 앞을 향해 흘러나간다. 어쩌면 마음을 계속 참아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책망은 반성을 부르거나, 억울함을 만든다. 이런 이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지 않는다. 자신의 탓이 아닌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내면의 상처는 곪고 깊어지리라.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그 힐난은 꽤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 억울한 분노가 향할 방향은 또 어디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별 앞에서, 서로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현명한 일은 연애의 과정을 천천히 복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별은 어떤 갈등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갈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그 후 비로소 답은 명쾌해진다.

내가 탓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 곧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각기 애썼다는 것을. 다만 그를 극복하기에 우리 둘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관계가 만들어지는 방법, [500일의 썸머]

Take me out tonight. Where there’s music and there’s people who are young and alive.

Driving in your car I never never want to go home because I haven’t got one anymore.

This is a story, a boy meets a girl

출근길 엘레베이터 안에서 여자를 마주쳤을 때, 남자의 헤드셋에서는 더 스미스(the Smith)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부터 여자에게 반해 있었고, 여자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 음악에 반응했다. 드디어,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머지 않아 회식 자리에서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고, 둘은 친구가 된다. 정확히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믿었지만,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그녀를, 옥토퍼스 가든을 좋아하는 그녀를,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그의 사랑을, 그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그를,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을 중시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But, this is not a love story

영화 [500일의 썸머] 속 썸머는 한때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일방적인 어장관리녀라 비판했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싫다.”는 말을 그저 (비)웃어 넘길 뿐이었다. <건축학개론> 속 수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썸머가 일방적이었던가. 그녀는 톰에게 몇 번을 반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톰은 여기에 대해 ‘동의하는 척’ 했다. 괜찮냐고 묻는 썸머에게 톰은 다시 수차례 괜찮다고 답했다. 톰과 썸머의 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은, ‘친구로도 괜찮다’는 대답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썸머는 톰에게 일종의 ‘이용 전 약관’을 건넨 셈이다. 주의사항과 이용 전 약관을 꼼꼼히 읽지 않고 동의 버튼을 누른 댓가는 처참하다. 대충 읽고 동의했다면, 그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톰은 오로지 썸머만 탓할 뿐이었다.

 

당신 곁에 머물다간 관계에 대하여

관계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한다. 그것은 연인 간의 관계일 수도, 혹은 친구 간의 관계일 수도, 가족 관계일 수도, 또는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 역시 흔히 목격한다. 다만 아쉽게도 그것이 썸머만의 탓일 수는 없다.

관계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낼 수 있는 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기에, 두 사람이 관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기에 관계에 대한 책임은 결코 누군가 한 명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연애, 우정, 가족… 모든 관계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녀)가 원하는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납치된 어린 아이라는 환상과 무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계는 두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화의 끝 무렵, 톰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해낸다. 여름(summer)이 가고, 가을(autumn)이 그에게 찾아온다. 여름은 아픔과 성장통의 시기이며, 가을은 수확과 추수의 시기이다. 지난 여름 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 톰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알 법이 없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다. 톰이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혼자서 정의하고, 혼자서 사랑하고, 혼자서 망쳐버리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 썸머와의 관계들을 통해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탓하고만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