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뷰티 인사이드]

현실이 만든 어떤 이별

자고 일어나면 몸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우진. 그처럼 기묘한 몸을 가지게 된 건 청소년 때부터였다. 어느 순간 그랬다. 남자였다가 여자였다가, 노인이었다가 아이었다가, 백인이었다가 흑인이 된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별 수도 없다. 그런 몸에 적응할 수밖에. 덕분에 그의 집에는 수십, 어쩌면 수백의 옷과, 안경과, 렌즈와, 신발이 있다.

그는 가구를 만든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가구. 아마도 모든 ‘한 사람’이 되곤 하는 그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런 그가 한 사람에게 반한다. 이수라는 이름의 여자. 가구점에서 가구를 안내하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느낀다. 그녀의 관점과 생각, 시선이 그를 끌어당긴다.

우진은 이수에게 스스로를 고백하고, 이수는 어렵게, 어렵게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수는 하루에 한 번 남자를 바꾸는 여자가 되고, 이수 주변에는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수 역시 우진을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녀는 매일 달라지는 우진의 모습을 알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수의 긴 고통 끝에, 우진은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힘들고 아픈 이별.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 상처 입고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상황은, 현실은 그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넌 날 이해 못해, 넌 나를 몰라

현실이 만드는 이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비단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몸이 없어도, 이별은 쉽다. ‘헤어지는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한다. 나이 차이가 되기도 하고, 학벌 차이가 되기도 한다. 성적 지향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별이 무려 전체의 82.9%라는 이야기는 현실감 없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헤어짐은 강남의 사거리처럼, 트웬티스 타임라인)

우진을 ‘사회적 소수자’에 대입해볼 수 있으리라. 그는 성소수자이며 장애인이고, 빈곤하고, 저학력자이며,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산다. 그에게는 시간조차 없다. 덕분에 그와의 연애는 쉽지 않다. 남들의 시선, 인식과 관점의 차이와 부족한 시간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확실히 쉬운 연애는 아니다.

감정적 이별에는 책임이 있다. 누군가가 마음이 식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친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 때로는 한쪽이 잘못하고, 가끔은 서로 잘못한다. 이 경우 책임을 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 피타고라스가 요즘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황금비율이 아니라 이별의 책임비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경제적·사회적 이별에는 명백한 책임이 없다. 권태도, 싫증도 관계 외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별을 앞둔 커플에게 가장 힐난하기 쉬운 상대는 바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도대체 왜 그래, 왜 날 이해 못 해줘, 어쩔 수 없었다고 했잖아.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그리고 이별.

 

그럼에도 아주 명확한 한가지

흔한 패턴이다. 잘 짚이지 않는 현실보다는 눈 앞의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훨씬 편하며 때로는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연애는 무척 사적이며, 개인적인 일처럼 여겨지니까. 표출할 곳을 찾을 데 없는 분노는 용암처럼 바로 앞을 향해 흘러나간다. 어쩌면 마음을 계속 참아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책망은 반성을 부르거나, 억울함을 만든다. 이런 이별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지 않는다. 자신의 탓이 아닌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내면의 상처는 곪고 깊어지리라.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그 힐난은 꽤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 억울한 분노가 향할 방향은 또 어디일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별 앞에서, 서로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현명한 일은 연애의 과정을 천천히 복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별은 어떤 갈등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갈등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그 후 비로소 답은 명쾌해진다.

내가 탓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 곧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각기 애썼다는 것을. 다만 그를 극복하기에 우리 둘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을.

관계가 만들어지는 방법, [500일의 썸머]

Take me out tonight. Where there’s music and there’s people who are young and alive.

Driving in your car I never never want to go home because I haven’t got one anymore.

This is a story, a boy meets a girl

출근길 엘레베이터 안에서 여자를 마주쳤을 때, 남자의 헤드셋에서는 더 스미스(the Smith)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부터 여자에게 반해 있었고, 여자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 음악에 반응했다. 드디어, 그녀가, 관심을, 보였다.

머지 않아 회식 자리에서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고, 둘은 친구가 된다. 정확히는,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믿었지만,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그녀를, 옥토퍼스 가든을 좋아하는 그녀를,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그의 사랑을, 그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그를,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을 중시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But, this is not a love story

영화 [500일의 썸머] 속 썸머는 한때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일방적인 어장관리녀라 비판했고,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싫다.”는 말을 그저 (비)웃어 넘길 뿐이었다. <건축학개론> 속 수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인가. 썸머가 일방적이었던가. 그녀는 톰에게 몇 번을 반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톰은 여기에 대해 ‘동의하는 척’ 했다. 괜찮냐고 묻는 썸머에게 톰은 다시 수차례 괜찮다고 답했다. 톰과 썸머의 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은, ‘친구로도 괜찮다’는 대답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썸머는 톰에게 일종의 ‘이용 전 약관’을 건넨 셈이다. 주의사항과 이용 전 약관을 꼼꼼히 읽지 않고 동의 버튼을 누른 댓가는 처참하다. 대충 읽고 동의했다면, 그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톰은 오로지 썸머만 탓할 뿐이었다.

 

당신 곁에 머물다간 관계에 대하여

관계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한다. 그것은 연인 간의 관계일 수도, 혹은 친구 간의 관계일 수도, 가족 관계일 수도, 또는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 그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 역시 흔히 목격한다. 다만 아쉽게도 그것이 썸머만의 탓일 수는 없다.

관계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낼 수 있는 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기에, 두 사람이 관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정의 내려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기에 관계에 대한 책임은 결코 누군가 한 명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연애, 우정, 가족… 모든 관계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녀)가 원하는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납치된 어린 아이라는 환상과 무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계는 두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영화의 끝 무렵, 톰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깨닫고 성장해낸다. 여름(summer)이 가고, 가을(autumn)이 그에게 찾아온다. 여름은 아픔과 성장통의 시기이며, 가을은 수확과 추수의 시기이다. 지난 여름 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 톰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는 알 법이 없다.

다만 추측할 수는 있다. 톰이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혼자서 정의하고, 혼자서 사랑하고, 혼자서 망쳐버리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난 썸머와의 관계들을 통해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탓하고만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산책(Walk Alone)

산책 by Lupinnut

 

함께 걷던 그 길을 나 혼자 걸을 때 어색해진 손목으로 팔짱을 꼈지

차가워진 옷깃에 뭣도 닿지 않아서 애써 덤덤한 척 시선을 먼 하늘에 뒀지

가득 찬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가 술 한 잔 할 사람 없어 고개를 젓네

그래도 난 괜찮아 여기 혼자 왔는걸 네가 내 것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네

 

워우워어 모자란 것이 많아서 빈자리를 채우는 게 버거웠겠지

워우워어 모난 점이 너무 많아서 찔리지 않으려 숨어야 했겠지

 

적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대체 내가 누군지 잘 몰랐었어

몇 번의 실수들과 몇 번의 반성들과 몇 번의 반복들이 날 설명했지

지키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손에 쥘 것이라곤 내 손뿐이네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따가운 시선에 나 눈을 감았네

 

워우워어 모자란 것이 많아서 빈자리를 채우는 게 버거웠겠지

워우워어 모난 점이 너무 많아서 찔리지 않으려 숨어야 했겠지

간단하게 떠오른 멜로디를 모티브 삼아 간단한 코드 진행 위에 쓰워 봤습니다. 아이폰7과 개러지 밴드로 작업했습니다.

가난의 맛

대개 궁하다. 궁상 맞게 또 컵라면 이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다. 학식 먹기 싫다고 요 앞에 식당에 가자는 친구 말에 돈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게 부끄럽지만 별 수 없다. 벌고 또 벌지만 모을 새도 없이 잔액부족.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지금이야 좀 낫다. 적어도 월세나 생활비는 나가지 않는다. 집에만 붙어 있는다면 굶을 일은 없다. 공과금이 미납되었다고 전기가 끊길 수 있다는 독촉장은 날아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알바비가 들어왔다. 이중 대부분은 지난달 교통비, 얼마는 큰맘 먹고 할부로 샀던 가구, 또 얼마는 빌렸던 돈을 갚는 데 쓰일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또 당분간은 빈털터리다. 어머니가 물었다. “혹시 월급 들어올 때 안 됐니.” 어떻게 또 귀신같이 아셨다. 치킨이라도 사란다. 알겠다고 했다. 옷을 챙겨 입고 동네 치킨 집으로 향했다.

테이크 아웃은 천 원 할인인 곳이다. 배달보다 직접 사가는 게 싸다. 네 가족 다 먹을 걸 생각하면 웬만한 크기는 안 된다. “저기 2번 세트랑요, 혹시 콜라 큰 걸로 바꾸면 얼마인가요?” 20분 정도를 멍하니 앉아 조리와 포장을 기다렸다. <썰전>을 잠시 보다가 <백종원의 푸드트럭>으로 눈을 돌렸다. 백종원이 맛이 없는 푸드트럭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을 때쯤

“포장 다 됐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차, 서비스직에서 일하다 보면 이게 문제다. 감사합니다의 뒤에는 어김없이 안녕히 가라는 말이 붙는다. 가긴 어딜 가, 내가 가야지. 포장된 치킨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러다 기껏 산 치킨 다 젖겠네. 우산은 들고 나오지 않았지만 굳이 뛰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2만원? 그렇게 비싸니? 치킨 값이 오르긴 올랐네.” “그래도 맛은 있네.” 뭐 그런 실없는 대화가 오가고, 나는 헤헤 하고 웃는다. 그래도 넷이 먹기는 좀 부족한 양이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먹는 게 중요하다.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잠시 두드렸다. 딱히 쓸 이야기가 생각 나지는 않는다.

두 시간, 세 시간쯤 지났을까.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식탁에는 아까 큰 사이즈로 바꿔 산 콜라가 사 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펩시콜라. 김이 빠진 채 미지근한 단 맛이 목구멍으로 쏟아진다. 그 맛, 그 맛. 익숙한 맛이다.

불현듯 생각나는 어떤 장면. 오후 두 시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반지하방, 큼큼한 냄새, 주말인데도 밀린 일을 하느라 새벽에나 잠들었던 어느 날. 쌀이 다 떨어져 시켰던, 냉장고에 넣어둬 눅눅해진 피자 한 조각과 함께 마셨던 콜라와 똑같은 그 맛.

그 맛은, 가난의 맛이다. 돈이 너무 없었던 날, 월급을 받았지만 몇 달 밀린 월세와 공과금, 카드값으로 다 나가버린 그날, 쓸 수 있는 돈이 5만원 정도 남아서 탕진이라도 해버리자 싶어서 시켰던 치킨에 딸려왔던 콜라가 생각나는 맛.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서 편의점 기프티콘으로 샀던 도시락에 딸려 있던 콜라 한 캔이 생각나는 맛, 출근을 했다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법인카드로 사는 밥을 먹을 수 없었던 날, 반쯤 남은 생라면을 부숴 먹으며 마셨던, 생수통에 담겨 있던 김 빠진 사이다가 생각나는 맛.

그 맛은 가난의 맛이다. 나는 김 빠진 펩시콜라에서 가난을 느낀다. 곰팡이의 냄새를 느낀다. 햇빛이 비추지 않았던 그 방, 환풍이 되지 않았던 반지하방을 느낀다. 수도세를 독촉하던 문자를 느낀다. 후불교통카드가 정지됐다는 문자를 느낀다. 그 맛은 여실히 슬프다.

특별히 못나서 가난해진 것은 아니다

7월의 어느 이른 아침, 제부도의 한 상가 신축 현장이었다. 두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이를 처음 발견한 것은 현장 관계자였다. 두 사람은 연고도, 출신도, 성별도 달랐다. 이들을 묶은 것은 현실과 가난에 대한 비관이었다.

이들은 자살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사흘 전, 소셜 네트워크에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이를 기도하기도 했다. 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이 남긴 유서에는 많은 말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로는 충분했다.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서 태어나길…”

 

가난이라는 비극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돈이 든다. 먹고, 마시고, 자고, 씻고, 쉬는 데에 필요하다. 행여 아프기라도 하면 어떨까. 의료보험제도가 아무리 잘 되어 있다 해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은 상상 이상의 돈을 필요로 한다. 목숨을 유지하는데 그만한 돈이 드는데, 연명을 통해 벌 수 있는 돈이 터무니 없이 적다면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대개, 가난은 곧 죽음이다.

처지를 비관한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흔하다. 송파 세모녀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3년 밖에 흐르지 않았다.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 고통인 노년층의 자살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한 청소년이 남긴 쪽지의 내용이다. “스쿨 폴리스 아저씨는 연락이 없다. 우리가 가난해서 무시하는 것 같다.”

가난은 무시 당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유니셰프가 벌인 흥미로운 실험을 보자. 6살 소녀가 예쁜 드레스와 코트를 입었을 때는 모두가 관심과 호의를 비췄지만, 허름한 차림일 때는 무시와 무관심이 따를 뿐이었다. 소녀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가버리라고 말했는데 그게 너무 슬펐어요.”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가난은 구조의 문제다. 대개의 가난한 사람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해서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경제상황에 맞춰,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저 조금씩 가난해져 왔을 뿐이다. 부모의, 그 부모의, 그 부모의 가난을 따라서.

과거에는 가난을 뒤집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교육이 그랬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높은 월급을 받으며 남 눈치 안 볼만큼은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좋은 학벌을 위한 경쟁만 유지될 뿐, 좋은 학벌이 보장하는 미래 따위는 사라졌다.

‘학벌없는사회’가 해산하며 남긴 글을 보자.

“재생산이 불가능한 삶은 같은 학벌이라는 심리적 연결도 끊어내 버리고 모두를 파편화하고 있다. (중략) 지금은 학벌이 권력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끔은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다.”

그래, 이제 한 번 가난은 영원한 가난이 된 시대다. 조금이라도 덜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공인인증서와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가난을 경쟁하고, 증명해야 하는 시대다.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법

중산층이 붕괴되고, 사회 다수가 가난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지만 가난은 끝내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유는 대부분 단순하다. 가난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이라는 고통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은 쉽다. 가난한 이들과는 다른 나를 설정한다. 또 그렇기에 ‘나’는 절대 가난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빈곤한 이들에게 붙는 꼬리표는 이렇다; 부도덕하고, 게으르며, 노력할 줄 모르고, 더럽고, 품격 없다.

양상은 다양하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임대세대와 비임대세대를 나누어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 가는 길마저도 차별시키고, 비임대세대의 부모가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아이와는 놀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병신 같다, 좆같다는 말이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순간, 청소년들은 더 이상 이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럴 때 이런 말을 아무런 문제 없이 대체하는 말이 바로 ‘거지 같다’는 말이다. 전 대통령님께서도 사랑하셨던 드라마 OST를 떠올려보자. “이 바보 같은 사랑, 이 거지 같은 사랑 계속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

ⓒ SBS <시크릿 가든>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여성이라면 김치녀가 되고 된장녀가 된다. 성폭력 피해자라면 돈을 노리고 접근한 꽃뱀이 된다. 계급상승을 이뤄낸 이라면 ‘개천 냄새 난다’는 모욕을 듣는다. 남성이라면 ‘가난하고 못 배웠을수록 씹치남’ 같은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바로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곁에

가난은 혐오하고 불쾌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88올림픽 직전, 도시미관 및 환경정비를 빌미로 집을 잃었던 이들이, 지난 2010년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서울역에서 쫓겨나야 했던 홈리스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월가 점령 시위, 월 스트리트 ⓒHuffPost

사회 다수가 가난에 가까워지고 있다. 1%가 부의 99%를 독점하고, 99%가 남은 부의 1%를 공유한다는 말은 구호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중산층의 붕괴는 심화됐다. 소득은 양극화됐다. 가난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가난을 혐오하는 이들은 상위 1%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래에서 가난과 맞닿아 있는 이들이다.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이는 당신이며, 또 나이다. 가난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그들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해서 벌을 받아 가난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당신이 특별히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 상으로 가난을 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페이스북 바깥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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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이스북은 다른 삶을 보여준다. 다른 문화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무척 열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를 비추는 시선은 무척 단조롭고, 폐쇄적이다. 이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 좋아요는 이 시선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2. 더불어 이곳에는 수없이 많은 삶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먹은 점심 메뉴처럼 사소하기 그지 없는 것부터, 나조차 잘 기억나지 않아 손을 더듬어야 하는 지난 연애의 역사, 졸업과 입학, 취업, 응원하는 스포츠 팀의 성적 또 누군가의 죽음과 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계정까지. 페이스북은 삶을 먹으며 멈추는 법을 모른 채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페이스북이 싸이월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나.

3. 페이스북 바깥을 고민한다. 그것이 트위터라든가, 인스타그램이라는 허무한 결말은 아닐 것이다. 카카오톡이나 텔레그램일 리도 없다. 다만 좀 더 긴 글을 담을 수 있고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어쩌면 잘못된) 의견에 영향을 되도록 적게 받을만한 것이 무엇인가.

4. 대답은 블로그였다. 완벽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읽게 하기까지가 무척 어렵다. 결국 그 중간 다리에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이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시작한다.

그 호의, 잠시 넣어두세요

가끔 편의점 알바를 한다. 오늘은 내일로를 간 친구 대타였다. 그리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는 돈이 궁했고 그 녀석은 시간이 궁했다. 부럽다. 나는 아직 못 가봤는데. 그런 말을 “알겠다 잘 다녀와”라는 문자 뒤로 숨겨 놓았다.

뭐, 별다를 것 없었다. 열 시쯤이 되어서는 막 나간 상품들을 채워 넣었다. 과자류, 컵라면, 삼각김밥이 팔리고 난 자리를 다른 물건으로 매꿨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매장 안과 밖을 빗자루로 쓸고, 대걸레로 닦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볼 때마다 한국인의 양심과 시민의식을 의심케 하는, 편의점 벤치 위에 잔뜩 쌓인 쓰레기들도 분리수거했다. 일반쓰레기와 재활용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가 동시에 나온다. 담배꽁초가 바닥에 가득했다. 날은 쨍쨍 쪘다. 더워서 몸이 녹을 것 같았다.

이런 날엔 적당한 음료와 아이스컵이 필수다. 7월 한 달 간 반값 할인을 하는 음료와 500원짜리 아이스컵을 사 부었다. 여기는 직원 할인도 없나. 직원이 물건을 사 매출을 채우다니, 정말 이상한 구조다.

키야, 시원하다~!

점심 시간이다. 물류가 들어온다. 아이스컵 두 박스, 아이스크림 세 박스, 김밥과 샌드위치. 우선 아이스컵이 녹기 전에 이것 먼저 정리해야 한다.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라. 아이스컵 냉장고가 문제다. 누가 유리 문 손잡이를 망가뜨렸다. 아이, 이거 잘 안 들어가네. 다시 한 번, 그때.

“아이, 왜 이걸 못하고 있어. 내가 해줄게.” 거구의 남자 손님이었다. 나이는 40대 후반 정도 돼보였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니, 손님 괜찮습니다. 이건 제가 할..” “아니야, 됐어. 내가 잘 알아. 이거는 아예 문을 빼서 하면 돼. 자 들어봐.” 그는 유리 문을 냅다 뜯어 버렸다. “아뇨, 손님 괜찮으니 제가 하겠…”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쨍그랑-하고 깨졌다. 냉장고 문이 깨졌다.

패닉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됐다. 아, 주님. 제발, 이러지 좀 맙시다. 그는 다짜고짜 내게 성질을 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끼우는 법도 사장이 안 가르쳐줬어요? 좀 배웠어야지. “아뇨, 저기요 손님. 지난 번엔 그냥 제가 끼우는 방법으로 잘 끼웠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고, 이윽고 다시 화를 냈다.

“아니 아이스컵 얼른 옮겨야지 뭐해요. 여기 무슨 냉동실 없어요? 이런 거 보관하는 데?” “아뇨, 아이스크림 냉장고 말고는 없는데요.” “아니, 그게 왜 없어? 보관하는 데 있을 거 아니야.” “아뇨, 없습니다…” 말줄임표 뒤에 수백 마디의 말을 집어 넣었다가 다시 지웠다. 그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냈다면 나는 아웃사이더보다 말을 빨리 해내는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 분 참…

그러더니 30초 후 그는 다시 내게 성질을 냈다. “아니 답답하네 거참, 빨리 유리 안 치우고 뭐해요, 손님들 다 다치게 생겼잖아.” 아니, 그건 유리를 깬 사람이 할 말은 아니죠. 답답했다. 그래도 손님인데, 참자. 그래도, 좋은 의도로 그랬을 텐데,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오. 나는 마침내 부처가 되고 있었다. 오, 이것도 계획에 없었답니다, 주님.

그렇게 유리를 치우는데 여념이 없었을 때,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내가 미안하긴 한데. 나도 다른 편의점 점장이에요. 저거 유리 전화하면 금방 오니까 전화해요.” 그는 자신의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유리를 깬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는 것처럼 무심한 듯 시크하게 가게를 나가버렸다. “저기요, 번호 주셔야죠.”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매대 뒤에는 벌써 손님이 한 가득이었다.

이거, 지웅 씨가 내주셔야겠는데요?

그 결과, 나는 5만원에 달하는 아이스컵 냉장고의 문 값을 물게 됐다. 그날 하루치 일당보다 조금 더 많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도움을 베풀던 그는 결국 폐만 끼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것은 매우, 불필요한, 호의였고, 매우, 의미없는, 친절이었다. 그는 무척 좋은 의도로 나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점장’이기 때문에 ‘알바’인 나를 가르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결과는? 이렇다. 호의는 때로 이토록 지독한 폭력이 된다. 특히 그것이 상대가 원하지 않았을 때라면 더욱 그렇다.

“너 살 좀 빼야겠다, 건강에 안 좋아.” 유리문이 하나 깨졌다. “취업은 했니?” 유리문이 또 하나 깨졌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너무 늦게 하면 안 좋아.” 와장창. “군대는 일찍 다녀와야 해.” 쨍그랑. “여자가 그러면 못 써.” 벌써 몇 장을 깬 거야.

우리는 이따금 호의를 가장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상대를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숙한 존재”로 가정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런 친절은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의 도움 없이도 그는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다. 당신의 도움이 정말 필요했다면, 또 당신이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라면 진작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유리를 깨고 싶지 않다면, 그 호의는 고이 접어 두시라.

심연 네트워크,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까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심연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니체의 말이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서 이 말은 이렇게 변주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다면, 페이스북 역시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 뭐, 페이스북의 자리는 트위터가 대신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이 차지할 수도 있다.

각각의 서비스는 각각의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심연은 이용자들의 이용패턴(좋아요, 체류시간 등)을 바탕으로 그가 과연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컨텐츠에 반응할지 계산하고, 그럴만한 컨텐츠를 그의 뉴스피드에 띄워 내고야 만다. 대부분 적중한다. 빅데이터는 이제 여러분의 바로 옆에 있다.

좋아요는 곧 돈이 된다.

결국 그는 심연을 더욱 오랫동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만 담은 머스트 해브 심연. 그럴수록 심연은 그를 더 잘 알 수 있게 될 테다. 어쩌면 그는 심연 속에서 동경하게 된 위대한 페북스타가 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관심에 만취한 채 배꼽에 소주를 담아 마실 수도 있다.

페이스북 안에서 ‘좋아요’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보이게 된다.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좋아요만 많이 받는다면 스폰서가 붙을 수도 있고, 광고를 받을 수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스타’다. 페이스북을 통한 유명세는 때로 TV를 압도한다.

괴물과 싸우고 있습니까

뭐, 페이스북에 골몰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을지 고민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실, 이 경구의 앞에는 더 새겨볼 만한 이야기가 붙는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역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라는.

이 말 역시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바꿔볼 만하다. “누구든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은, 그 역시 조리돌림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이 모두가 정의의 사자다. 정의의 사자들은 쉽게 흥분한다. 막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정의의 사자들이 나서 이들을 재단한다. 조리돌림에 참여하는 사람은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쉽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조리돌림을 위한 완벽한 매체다. 폐쇄성과 공개성과 전파력이 완벽히 상호보완된다. 뉴스피드에는 욕을 할 만한 사람이 캡쳐/공유/리트윗으로 계속해서 등장하고, 늘어나는 좋아요 숫자는 당신의 참여를 독려한다.

온갖 이유로 조리돌림이 이어진다.

덕분에 하루에 최소 한 명 이상은 광범위하고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다.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글 하나가 수백, 수천 명으로부터, 혹은 그 이상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었던 비난을 받게 한다.

그가 정말 비난 받을만한 일을 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망각되거나 무시된다. 물론 정말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다수의 사람이 한 명의 개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개인이 있었다

영화 <소셜포비아> 포스터

그 순간 개인은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셜포비아(2015)>가 좋은 예다. 트위터를 통한 조리돌림, 현피를 생중계한다던 아프리카 BJ와 압박을 받던 한 사람의 자살. 그리고 그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한 네티즌의 자살 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당장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 또 어제 일어났다고 해도 아, 그래, 안타깝네-하고 넘길 만큼 있음직한 일이다.

당신이 정의를 위해 남긴 글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때문에 소셜 네트워크의 모든 비난은 사형私刑이며, 즉결처형이다. 이 모순 앞에서 항상 망설여야 한다. 글을 쓰기 전 수십 번은 되물어야 한다. 맥락을 살피고, 말을 다듬어야 한다. 매번 팔짱을 낀 채 중립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신의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Christopher Nolan

한 면의 정의가 다른 쪽에서 보기에도 정의라는 법은 없다. 정의에는 쾌감이 없다. 정의는 늘 불쾌하고 불편한 축에 속한다. 당신이 내뱉는 말들이 즐겁고, 그로 인한 반응이 즐겁다면 당신은 아마 정의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자, 저 심연 속에서 분투하는 괴물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 그 역시 스스로를 정의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심지어 그 비난을 받게 될 사람이, 언젠가는 괴물이 된 당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