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호의, 잠시 넣어두세요

가끔 편의점 알바를 한다. 오늘은 내일로를 간 친구 대타였다. 그리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는 돈이 궁했고 그 녀석은 시간이 궁했다. 부럽다. 나는 아직 못 가봤는데. 그런 말을 “알겠다 잘 다녀와”라는 문자 뒤로 숨겨 놓았다.

뭐, 별다를 것 없었다. 열 시쯤이 되어서는 막 나간 상품들을 채워 넣었다. 과자류, 컵라면, 삼각김밥이 팔리고 난 자리를 다른 물건으로 매꿨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매장 안과 밖을 빗자루로 쓸고, 대걸레로 닦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볼 때마다 한국인의 양심과 시민의식을 의심케 하는, 편의점 벤치 위에 잔뜩 쌓인 쓰레기들도 분리수거했다. 일반쓰레기와 재활용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가 동시에 나온다. 담배꽁초가 바닥에 가득했다. 날은 쨍쨍 쪘다. 더워서 몸이 녹을 것 같았다.

이런 날엔 적당한 음료와 아이스컵이 필수다. 7월 한 달 간 반값 할인을 하는 음료와 500원짜리 아이스컵을 사 부었다. 여기는 직원 할인도 없나. 직원이 물건을 사 매출을 채우다니, 정말 이상한 구조다.

키야, 시원하다~!

점심 시간이다. 물류가 들어온다. 아이스컵 두 박스, 아이스크림 세 박스, 김밥과 샌드위치. 우선 아이스컵이 녹기 전에 이것 먼저 정리해야 한다.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라. 아이스컵 냉장고가 문제다. 누가 유리 문 손잡이를 망가뜨렸다. 아이, 이거 잘 안 들어가네. 다시 한 번, 그때.

“아이, 왜 이걸 못하고 있어. 내가 해줄게.” 거구의 남자 손님이었다. 나이는 40대 후반 정도 돼보였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니, 손님 괜찮습니다. 이건 제가 할..” “아니야, 됐어. 내가 잘 알아. 이거는 아예 문을 빼서 하면 돼. 자 들어봐.” 그는 유리 문을 냅다 뜯어 버렸다. “아뇨, 손님 괜찮으니 제가 하겠…”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쨍그랑-하고 깨졌다. 냉장고 문이 깨졌다.

패닉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됐다. 아, 주님. 제발, 이러지 좀 맙시다. 그는 다짜고짜 내게 성질을 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끼우는 법도 사장이 안 가르쳐줬어요? 좀 배웠어야지. “아뇨, 저기요 손님. 지난 번엔 그냥 제가 끼우는 방법으로 잘 끼웠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고, 이윽고 다시 화를 냈다.

“아니 아이스컵 얼른 옮겨야지 뭐해요. 여기 무슨 냉동실 없어요? 이런 거 보관하는 데?” “아뇨, 아이스크림 냉장고 말고는 없는데요.” “아니, 그게 왜 없어? 보관하는 데 있을 거 아니야.” “아뇨, 없습니다…” 말줄임표 뒤에 수백 마디의 말을 집어 넣었다가 다시 지웠다. 그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냈다면 나는 아웃사이더보다 말을 빨리 해내는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 분 참…

그러더니 30초 후 그는 다시 내게 성질을 냈다. “아니 답답하네 거참, 빨리 유리 안 치우고 뭐해요, 손님들 다 다치게 생겼잖아.” 아니, 그건 유리를 깬 사람이 할 말은 아니죠. 답답했다. 그래도 손님인데, 참자. 그래도, 좋은 의도로 그랬을 텐데,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오. 나는 마침내 부처가 되고 있었다. 오, 이것도 계획에 없었답니다, 주님.

그렇게 유리를 치우는데 여념이 없었을 때,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내가 미안하긴 한데. 나도 다른 편의점 점장이에요. 저거 유리 전화하면 금방 오니까 전화해요.” 그는 자신의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유리를 깬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는 것처럼 무심한 듯 시크하게 가게를 나가버렸다. “저기요, 번호 주셔야죠.”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매대 뒤에는 벌써 손님이 한 가득이었다.

이거, 지웅 씨가 내주셔야겠는데요?

그 결과, 나는 5만원에 달하는 아이스컵 냉장고의 문 값을 물게 됐다. 그날 하루치 일당보다 조금 더 많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도움을 베풀던 그는 결국 폐만 끼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것은 매우, 불필요한, 호의였고, 매우, 의미없는, 친절이었다. 그는 무척 좋은 의도로 나를 도우려 했을 것이다. ‘점장’이기 때문에 ‘알바’인 나를 가르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결과는? 이렇다. 호의는 때로 이토록 지독한 폭력이 된다. 특히 그것이 상대가 원하지 않았을 때라면 더욱 그렇다.

“너 살 좀 빼야겠다, 건강에 안 좋아.” 유리문이 하나 깨졌다. “취업은 했니?” 유리문이 또 하나 깨졌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너무 늦게 하면 안 좋아.” 와장창. “군대는 일찍 다녀와야 해.” 쨍그랑. “여자가 그러면 못 써.” 벌써 몇 장을 깬 거야.

우리는 이따금 호의를 가장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상대를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숙한 존재”로 가정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런 친절은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의 도움 없이도 그는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다. 당신의 도움이 정말 필요했다면, 또 당신이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라면 진작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유리를 깨고 싶지 않다면, 그 호의는 고이 접어 두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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